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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오피니언

농암의 명당 세 자리

문경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4.12.19 05:45 수정 2024.12.19 05:45

글 - 김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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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신숙빈(申叔彬, 1457~1520)은 문희공(文僖公) 개(槩)의 후손으로 거창현감을 지내다가 빙부인 안귀손과 함께 불혹에 가은 소양으로 복거하게 된다. 무오사화(1498년) 때 관직을 버리고 들어와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세상 부귀영화와 욕심을 버리고자 맑은 날이면 논밭을 갈아 농사를 짓고 약초 캐며 영수를 굽어보며 마음을 씻고 다스렸다. 有山有水度 산도 있고 물도 있는 곳에 無榮無辱身 영화도 없고 욕심도 없는 내 몸 耕田消白日 밭 갈며 하루 해를 보내고 採藥送靑春 약초 캐며 청춘을 보내노라 이렇게 시를 짓고 처사로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고 소상팔경의 은둔군자로 살던 그는 안귀손과 함께 숙종 23년(1697년) 농암면 가항리 <한천서원>에 배향(1697년)되기에 이른다. 그 서원 주변 산자락엔 평산신씨 종중 선산이 소재하고 있었고, 이곳은 예로부터 명당 자리가 있었음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단순히 풍수지리를 믿는 그 이상의 교훈적인 뜻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신처사 후손이 농암 가항리(가실목)에서 묘소를 정할 때 지관이 명당으로 두 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그중 한 곳은 여기 묘소를 쓰면 자손들이 만석지기로 부자가 될 것이라 했고, 또 다른 한 곳은 이후 8대 손까지 혈식군자(血食君子)들이 추앙하는 인물이 배출되지만, 집안에 손이 귀하게 되고 가난이 극에 달할 것이라 했다. 하여 후손들은 명예를 더 중시해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후 독자로 내려오다가 손이 없어 양자를 들이게 되고, 급기야 집은 불이 나서 소가 타고 가세가 극심하게 기울었다. 이렇게 힘든 시간들이 이어져도 후손들은 가문의 명예를 지켜나가기 위해 변함없이 인내하며 묘소를 보전 수호해 왔다. 그러다가 자손이 8대에 이르러자 도저히 성묘가 힘들다고 후손들이 이장을 추진하였다. 이때 묘를 개장하였더니 놀랍게도 흰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로 솟았다. 그러나, 이미 파묘를 했으니 돌이킬 수 없었고, 후손들의 생각 부족으로 명당이 사라지는 너무 애석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후 옛 영화를 회복하지 못했으니 이 사건은 위선 봉사에 관해 경종을 울리는 교훈을 남기게 되었다. 하나의 명묘를 일시적으로 잘 수호하기보다는 누대에 걸친 수호가 발복지지의 길이 되므로, 효심이란 눈앞의 가까운 이득에만 이끌리지 않고 한결같이 지성으로 수호하면 자손들이 오래도록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굳이 좋은 묘자리를 잡으려고 이름있는 지관을 부르고 좌청룡 우백호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근본이 있는 가문의 후손이라면 선조의 덕업을 쉬이 망각하거나 묘를 보기 흉하게 방치하지 않는다. 견문각지(見聞覺知)라는 말처럼 부모로부터 은연중에 보고 듣고 배우기 때문에 별도로 가르치지 않아도 잘되는 집안은 선대를 본받아 스스로 실천하게 된다. 그러기에 어쩌면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을 기대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살아서나 죽어서도 한번 맺어진 가족 관계는 바꾸거나 버릴 수 없기 때문에 효에 충실한 자손들이 큰 벌을 받거나 지탄받는 일은 매우 드문 것이다. 허나 자신의 영일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명예나 가내의 전통과 선조의 유지를 받들기보다는 사리사욕에 더 경도되어 있음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소양서원 우편으로는 개골산이 있다. 이곳에 신숙빈 처사의 부부 묘소가 있는데, 이 산소 자리는 <연소혈(燕巢穴>이라고 하며, 산 위쪽에 있으면서 생긴 모양이 마치 제비집 같아 보인다. 산 정상에서 떨어지거나 먼 곳은 연소혈로 보지 않고, 제비의 집이 처마 밑에 지어지듯 지붕과의 상관 관계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야 되는 혈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그리고 제비집 앞은 제비 똥이 쌓이게 되므로 그 앞쪽으로 제비 똥이 쌓인 것처럼 돌출되는 안대(案臺)가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안대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런 연유로 연소혈 산소를 가려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 수고를 하여야 함은 당연한 것이므로 후손들이 산소를 자주 오르내리는 수련이 가문의 힘과 기틀이 된다는 말이다. 이같이 보기 드문 연소혈 자리에 모신 신처사의 명당 덕분인지 문경지역의 평산신씨 후손들은 대부분 그의 후손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였으니 각계 각층에 걸출한 인물들이 헬 수 없이 탄생하였다. 문경군을 일컬어 신석호(申石虎)의 고장이라 하는 이유가 평산신씨와 돌(석탄)과 호랑이가 많다는 말로, 문경은 신처사의 후손들이 이끌어가는 특별한 땅이라 말하기도 한다. 한편 종곡리 뒷바리에도 손꼽히는 명당이 있으니 그곳은 <맹호하산혈(猛虎下山穴)>으로 불린다. 성재산 아래로는 <사자바우>가 있고, 괴정 진향루 바로 아래는 <범바우>가 있으며, 그 중간쯤에 <개바우>가 위치하고 있다. 사자와 호랑이가 개를 사이에 두고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으나 서로 눈치만 보면서 잡아먹지 못하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니, 이 지형에서는 사자와 범보다는 개가 있는 곳이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성지가 되고 있다. 개바우는 한일합방이나 625동란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스스로 운다고 한다. 그곳은 소도와 같은 성지로 신령한 힘이 샘솟고 있어 신태식 의병장과 이강년 의병장이 구국일념으로 출병하면서 개바우에서 밀정자를 효수하고 진군을 시작하는 창의의 성소가 되었다. 우복산 소의 뒷발에 해당하는 도발산(道發山)의 호랑이는 영물이었다. 견훤의 부모가 아기 견훤을 밭둑에 누이고 일을 하고 있으면 범이 내려와 그에게 젖을 먹이고 돌아갔다는 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뒷바리 도발산에 있는 김택수(1769~1800)의 묘자리는 호랑이가 점지해 준 명당자리로 소문이 나 있다. 1800년 정월 이레, 겨울눈이 펑펑 내리던 날 밤 큰일이 벌어지고 만다. 밤중에 소변을 보러 나갔던 김택수가 돌아오지 않자 부인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 불을 켜고 나가보니 사람은 없고 큰 짐승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부인은 혼비백산하여 마을 사람들을 모아 횃불을 밝히고 발자국을 따라나섰다. 도발산 중허리 큰 소나무 밑에다 남편을 물어다 놓고 눈에 불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호랑이가 사라진 뒤 남편은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으나 사흘 뒤 세상을 떠났고, 호랑이가 물어다 놓은 그곳에 묘를 썼는데 이곳을 최고의 명당이라 부르면서 묘자리 다툼이 생기게 된다. 명당 자리라는 소문이 고을에 퍼지자 조상의 묘를 지키려는 가문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목숨을 건 다툼이 벌어진다. 묘를 먼저 쓴 대정리의 순천인 김성의와 나중에 쓴 왕릉리의 안동인 김병옥의 양가 다툼으로 문경 현감이 이를 권력과 부에 매도되어 올바로 처리하지 못하자, 결국 김성의 아들인 김영재가 한양으로 올라가 고종의 거둥 행차를 가로 막고 격쟁 상소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김병옥 아들 김우용이 거짓 문서를 꾸며 김성의가 무고했다며 격쟁 상소하였다. 이는 명당 자리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임금 앞에서 까지 거짓말을 서슴치 않는 무례 무엄한 지경에 이른다. 10여 년 간에 걸친 산송사건으로 김성의 집안은 4명이 목숨을 잃고 공갈 협박에도 굴하지 않으며 여러 차례 옥살이를 하는 등 불의에 끝까지 맞서 싸웠고, 김병옥 집안은 권문세가에다 칠백석 부자였지만 탐관오리를 매수하여 총력전을 폈으나 소송의 끝에는 멸문지화가 되면서 알거지가 된 채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결국 약한 정의가 강한 불의를 꺾는 결론에 이르면서 다툼은 막을 내렸으나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후손들은 선조의 장한 뜻을 기려 격쟁 승소를 기념하여 정자를 지었는데 그 정자가 바로 <윤하정>이다. 그리고 김택수의 산소를 수호한 음덕을 입어 그간 5대 독자로 내려오던 위태롭던 집안이 나날이 번성하여 수백 명의 자손들이 번성하면서 큰 복을 받게 되었다. 이 정자는 <대한민국 최초의 격쟁승소 기념 정자>로 국민청원제도인 신문고 역사 유적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이 사건의 격쟁 상소는 서울대 규장각도서관에 보관 중인 <추조결옥록(조선범칙사건 기록대장)>에 기록되어 있다. 위 세 가지 사례를 보면 명당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후대가 잘 지키고 수호하여야 발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흰 연기와 제비집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명당 이야기를 말하면, 요즘 세상에 무슨 그런 미신을 믿느냐고 힐난할 수 있겠지만 선조의 묘를 잘 가꾸고 지키는 것이 자손들의 위선과 효사상에 대한 참 교육이 되며, 그걸 다른 방법으로 훈육하여 실천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화장과 수목장, 납골묘 등이 지배하는 시대라 해도 산 사람의 편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선조들에 대한 기본 예와 효사상이 가정의 화목과 단결을 가르치는 산교육이 된다는 점은 결코 가벼이 생각해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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