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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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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자체 단체장들은 지역 발전을 위해 크고 작은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지역의 유명인물이나 특별한 역사 유적과 자연유산 등을 활용한 지명 개정이다. 이 사업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홍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어 이런 류의 사업은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군위군 삼국유사면, 상주시 사벌국면, 고령군 대가야읍, 영월군 김삿갓면, 보은군 속리산면으로 바뀌었 고, 세종로, 충무로, 율곡로, 퇴계로, 중봉로, 당교로, 계백로, 견훤로, 유관순로, 우륵로, 소월로, 박지성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추세를 감안하면서 농암의 지명을 한번쯤 따져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농암>이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최초로 등장했다. 이때 농암을 새로운 지명으로 명명하는 것에는 별반 어려움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어느 곳이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 중심이 될 뿐 아니라, 이 고을의 중심이면서도 견훤의 <천마탄생설화>를 갖고 있는 장롱처럼 생긴 신비한 <농바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농바우를 한자로 표기하여 <농암(籠巖, 籠岩)>이라 명명함으로써 무리 없이 행정 개편된 새 지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일부 기관에서는 <용암(龍巖)>으로 오기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내서리 쌍용(雙龍)계곡이라는 명소의 용(龍)을 농암의 농(籠)자로 잘못 알고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농바우라는 마을은 그대로 남아있고, 구한말 시장만 개바우 쪽으로 옮겨 왔으니 예전 농바우는 구농바우, 새로 생긴 농바우는 신농바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신구로 구분하는 것은 혼란의 여지가 있으므로 칡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구농바우를 <갈동(葛洞)리>로 부르고, 신농바우는 <농암(籠岩)리>로 부르며 오늘날 까지 백 십여년 동안을 사용해 오고 있다. 이때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가은읍 민지리(섬안, 더대)가 농암면에 편입되어 50년간 같은 고을로 함께하며 반 세기의 시간이 견고하게 화석화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농암과 견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물음 하나를 던질 수 있다. 농암이란 지명은 농바우에서 왔고, 농바우는 견훤의 탄생설화를 갖고 있다. 옛날 전설에 의하면, “옥황상제의 딸과 몰래 사랑을 나누다가 발각된 총각 구호는 천마산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호환에 아버지를 잃은 처녀 아비의 원수를 갚아주고 동거를 하였다. 유배가 끝나 아비 처녀가 임신한 상태로 함께 천상에 올라오자 옥황상제와 공주가 화를 내며 이들을 쫓아내어 둘은 농바우와 천마산에 각각 떨어져 바위가 되었고, 후에 바위가 갈라지면서 견훤이 태어났다.”, “하늘에서 죄를 지은 선녀를 옥황상제가 벌하기 위해 천마에 농 두 개를 싣고 지상으로 내치니 하나는 농바우 마을에, 하나는 민지리에 떨어졌다. 후에 농바우가 갈라지면서 견훤이 태어났다.”는 설화에서 옥황상제, 옥황상제 딸, 천마가 동시에 등장하고 그 후 바위에서 견훤이 탄생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이는 견훤은 결국 하늘이 내린 인물로 정의된다.
그리고 농암면 삼송리에도 또 하나의 <농바우>가 있으므로 농암면에는 두 개의 농바위가 존재한다. 삼송리 농바우도 넓적한 농처럼 생긴 바위가 커다란 암반 위에 얹혀있는데, 한 사람이 흔들거나 여러 사람이 흔들어도 똑같이 움직인다. 이 바위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아낙이 바위를 만진 후 태기가 있어 그 후 7남매의 어미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아이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찾는 바위가 되었다. 갈동리 농바위는 영웅이 출현하는 신령한 바위이고, 삼송리 농바위는 다산의 신통력을 가진 바위로 두 곳이 고귀한 인물 탄생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음을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다.
또, 농암에는 견훤과 관련된 두 개의 전설 속의 말바위가 있다. 말바위 하나는 종곡리, 다른 하나는 건너편 연천리에 있다. 종곡리 북실에는 <골마>라는 마을에 있는데, 여기서 <북실>은 견훤이 북을 치며 군사를 조련시키던 훈련장(북짓골)이 있는 곳이다. 견훤이 종곡 말바우에서 용마를 구해 타고 연천 말바우로 화살을 쏘면서 빠르기 시합을 했는데, 시작 뒤 연천 말바우로 달려가 보니 화살이 없어 용마의 목을 쳤고, 후에 화살이 날아오므로 경솔함을 한탄했다는 것이다. 그때 말의 목의 칠 때 나온 피가 바위에 묻어서 지금까지 연천 <말바우>가 붉으며, 실수로 말의 목을 친 곳이라 하여 <말바우>라 부른다고 전한다.
위 전설은 구전과 구전을 기록한 전설로 전해지며, 이외에도 견훤 관련 지명과 유적 등은 얼마든지 있다. 궁기리에는 견훤이 궁을 지었다는 <궁터>와 견훤을 신으로 모시는 <궁기 골맥이>가 있고, 성재산에는 <견훤산성>, 성재산 아래는 <견훤 우물>이 있으며, 천마산(쪽금산)에는 <견훤산성 보조성>이 있다. 그리고 구 청암중 운동장 한켠에는 <가항동골맥이>가 있고, 갈동리(구농바우)에는 견훤이 심었다는 <견훤 느티나무>, 견훤이 태어났다는 <농바우>, 견훤이 목을 친 말을 묻었다는 삼밭골의 <말무덤> 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농암은 농바우의 한자 표기로, <농암면>은 다르게 바꾸어쓰면 <견훤면>이 된다. 왜냐하면 <농바우>는 견훤의 탄생설화의 유물이자 증거이고 영웅 탄생이라는 의미 있는 천마설화를 갖고 있어 일개 국가를 세운 대왕의 신화 조건에 충족되므로 누구라도 견훤의 농암 탄생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견훤이 가은현에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기록을 근거로, 갈전리에 금하굴을 파서 야래자 전설을 정설로 내세우고 있으니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김두희 박사 주장)이 나온다. 1914년 행정개편 이전까지 농암은 가은현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견훤의 가은현 출생은 이견이 없으나, 야래자(夜來子) 설화를 끌어와 밤마다 남자(지렁이의 변신)가 찾아와 규중처녀와 정을 통하여 낳은 사생아가 견훤이라며 평민 이하의 취급을 하면서도, 왕릉시장을 <아자개장터>로 이름을 바꾸어 견훤 아버지가 아자개라 하는 것은 앞과 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아자개가 밤마다 찾아온 남자와 동일인이라면 모르지만 그렇게 이해될 리는 만무하다.
<야래자 설화>는 우리나라 다른 지방에도 전해오는 흔한 설화이고, 견훤의 말과 화살의 빠르기 시합에서 실수로 말의 목을 친 <아차>라는 지명유래도 여러 곳에 존재한다. 그런데 한 나라를 건국한 대왕의 탄생설화는 세계사를 뒤져봐도 영웅시 함에도 불구하고 견훤은 왜 <지렁이>와 <사생아>로 폄훼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아무리 사기가 승자의 기록이라 해도 패자를 존숭하지 않으면 될 것을 이렇게 밟으면 꿈틀하는 미물로 설정해 두고 그를 숭위전에 모신다는 건 병주고 약주고 하는 상식 이하의 처사가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라. 농암의 말바우에서 가은 갈전까지 여러 산이 막혀 있고 거리가 얼마인가? 그리고 아자개를 견훤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왜 금하굴을 만들어 지렁이의 후손이라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사생아로 전락시키다는 건 얼마나 큰 모순인가. 반면 두 개의 농바우는 귀한 영웅 탄생의 전설이고, 두 곳의 말바위는 명마 탄생의 전설이며, 두 가지 천마설화 전설은 천마산(쪽금산)과 천마산성(견훤산성)이 뒷받침해 주고, 견훤을 신으로 모시는 두 개의 궁기골맥이와 가항동골맥이가 어엿이 있음에도 왜 이를 인용하지 않는가?
이 정도 입증이 되었으면 이제 농암면을 견훤면이라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누가 아니라고 따진다면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낼 자신이 있다. 지나간 과거라 하여 적당한 수준에서 얼버무려 견훤의 독서굴이니 견훤 생가이니 연막을 치면서 그곳을 복원하고 후백제 역사를 재정비하겠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두 개의 농바우와 두 곳의 말바우, 두 가지 천마설화와 두 개의 골맥이는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스토리라는 점을 명료하게 재인식하여 제대로 쓰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견훤의 고장으로 탈바꿈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