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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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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문협(회장 김종호)은 지난 11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문경시립중앙도서관 2층에서 문협회원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경문학 15집 출판기념회 및 2020년 제3차 문학아카데미<이원규 시인님 강의>를 개최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생활속거리두기는 물론, 발열체크 및 참석자 명단 작성과 마스크 쓰기를 실천하며 행사를 진행했다.
또한 문인광장(통권 56호) 이달의 소재 '앵두' 작품들을 낭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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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강사 이원규 시인님은 '한국 현대시 어디로 가는가?'라는 주제로 시 창작론을 강의했다.
강의 원고는 다음과 같다.
<이원규의 시 창작론>
밥상머리 시학
물 마실 때는 물만 생각하고 밥 먹을 때는 오로지 밥만 생각하자. 약속시간, 배신감, 대출이자, 성적을 내려놓고 꼭꼭 씹으며 어느 동네 뉘 집 쌀인지 쌀자루에 새겨진 본적지를 살펴보자. 어금니로 잘박잘박 씹다보면 단물이 고이면서 고향의 모내기철 무논이 떠오를 것이다. 소낙비 내리고 개구리가 울고 새벽 물꼬 보러 나가는 외할아버지 장화 소리 밥상 위에 논밭이 올라와 다시 낙동강이 흐른다. 그러니까 멸치조림 먹을 때 멸치 눈을 피하지 말자. 너도 참 먼 길 돌아서 왔구나. 친구들과 남해 바다 헤엄치며 놀다가 바늘코 촘촘 그물인지 지족마을 죽방렴인지 잡히자마자 화탕지옥 가마솥에 들어가고 다시 뙤약볕에 일가족 풍장이라. 이 동네 저 골목 마트며 슈퍼를 떠돌다가 프라이팬 위에서 청양고추 올리고당 액젓에 버무려지며 죽어서도 몇 생을 돌고 돌아왔으니 멸치야, 너나 나나 팔자 한 번 고약하구나. 미안하다 멸치야, 비로소 너는 나고 나는 너. 너를 먹고 뼛속까지 단단해지면 깊푸른 바다의 기억으로 다시 헤엄칠 수 있으리니. 배추를 먹으며 고랭지 비탈 배추가 되고, 딴 마음 누르며 물 한 모금 마실 때 지리산 생수인지 삼다수인지 발원지를 떠올리면, 밥상머리에 동해 푸른 파도가 출렁이고 금수강산 한반도와 초록별이 생생할 것이니 밥 먹을 때 밥만 생각하며 밥을 먹으면 밥상 위에 시공초월이 따로 없고 수사학이 무색하다. 식사시간 더 오래 걸리지도 않으니 구두 신을 때 구두 뒤축의 행로를 생각하고 운전할 때 엔진과 타이어의 노고를 치하하자.
시라는 짐승은 밥상 너머 이국에 살지 않으니 잠자리에서 다른 여자 떠올리지 말고 오랜만이야 친구, 술 마시다 자꾸 핸드폰을 보지 말자. 밥상머리가 어긋나면 자꾸 생의 창자가 꼬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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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1>
그러나 나는 아직 너를 모른다.
1. 내 생애 유일한 신(神)은 시(詩)였고, 시는 곧 가시 같은 것이었다. 밤마다 아프게 콕콕 찌르는 신이 시요, 시가 가시였다!
짐짓 모른 체 돌아누워도 옆구리를 콕콕 찌르고, 벌떡 일어나 풍찬노숙의 먼 길을 걸어도 티눈처럼 돋아나 발가락을 콕콕 찌른다. 바깥에서 나를 찌르는 이물질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내 몸 속에서 아직 살이 되지 못한 뼛조각 같은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그러나 나는 아직 이 가시의 맨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자주 나의 문학적 첫 마음이자 유일한 스승인 고향 하내리의 맹인 김씨 아저씨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지만 나는 두고두고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산촌 하내리의 겨울밤
자정 넘어 함박눈 내리면
먼저 아는 이 누구일까
제아무리 도둑발로 와도
먼저 듣고 아는 이 누구일까
온 마을 길들이 덮여
문득 봉당 아래 까무러치면
맹인 김씨 홀로 깨어 싸리비를 챙긴다
폭설의 삶일지라도 살아온 만큼은 길 아니던가
밤새 쓸고 또 쓸다보면
맹인 김씨 하얀 입김 따라 열리는 동구 밖
비록 먼눈일지언정
깜박이는 눈썹 사이 하내리의 아침이 깃들면
맨 먼저 그 길을 따라
막일 나가는 천씨의 콧노래
등교하는 아이들의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
비로소 맹인 김씨 잠을 청한다.
- 졸시 <맹인의 아침> 전문
돌이켜보면 유년 시절의 나는 맹인 김씨의 안 보이는 눈을 얕보았던 게 분명하다. 안 보이면 곧 모르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대여섯 살 때부터 맹인 김씨 아저씨의 구멍가게를 들락거리며 과자를 사는 척 검은 포도 알을 몰래 빼먹는 등의 도둑질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맹인 김씨 아저씨는 하내리의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도 내 어린 발자국 소리를 읽어내고, 검은 포도 알을 빼먹는 어린 도둑의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마저 다 읽으면서도 모르는 척해주던 맹인 김씨, 그는 날마다 하내리를 훤히 들여다보는 신 같은 존재였다.
안 보이는 눈으로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 그 성문들을 나름대로 완벽하게 읽을 뿐만이 아니라 목소리 톤만으로도 그날 그 집안의 길흉화복을 읽어내고, 누구의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인지, 누구의 경운기 소리인지 모두 알았으니 맹인 김씨의 안 보이는 눈을 통해 하내리의 하루하루가 빠짐없이 필사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촌 하내리의 한겨울 한밤중에 소리 없이 함박눈이 내려도 가장 먼저 아는 이가 바로 맹인 김씨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함박눈이 내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아는 것도 범상한 일이지만 그 보다는 안 뒤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닐 수 없다.
맹인 김씨는 모두가 잠든 밤에 빗자루를 들고 나와 새벽이 올 때까지 동구 밖까지 눈을 쓸고 또 쓸었던 것이다. 이른 아침에 먼 길을 나가는 누군가의 시린 발을 생각하며.
나는 아직도 스무 살 무렵에 엿보았던 그 겨울밤을 잊지 못한다. 벌떡 일어나 빗자루를 들고 김씨 아저씨를 따라 함께 눈을 쓸 것인가, 이대로 지켜만 볼 것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밤을 꼬박 지새운 그 겨울밤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를 쓰기 시작한 지 35년이 넘도록 나는 여전히 시 창작의 방법론보다는 시인의 자세 혹은 시 창작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는 것이다.
시인의 자세 혹은 시 창작의 태도는 엿보기인가, 맹인 김씨의 예감인가, 예감과 실천의 암수 한 몸인가를 두고 나는 여전히 우왕좌왕하는 둔재로 살아왔다. 사실 그동안 엿보기도 잘 되지 않았을 뿐더러 워낙 둔감했으니 예감마저 외면하거나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 결핍의 와중에도 온몸을 구겨 넣으며 실천하려고 애를 썼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그저 이를 두고 시대정신이라 믿었다.
문학적 결실은 미미했으나 그래도 예까지 오는 길은 나름대로의 진흙탕과 가시밭길이었다. 세상의 부름에 어깨를 걸고 장구를 치고 춤을 추며 돌을 던지느라 10년을 보내고, 그 사이 죽거나 떠나간 이들을 생각하며 목을 꺾고 무릎을 꺾고 자책의 묵념을 하느라 10년을 보냈다. 말하자면 부조리한 세상에 맞선 투쟁의 상상력과 절망의 상상력에 초점을 맞춰 온몸의 더듬이를 곤두세우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답답한 시절들과의 단절이 바로 지리산행이었다. 어언 17년 전, 삼십대 중반의 아직 팔팔한 나이에 입산이라니! 당시의 혈기가 아찔하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거침이 없는 무애의 날들이었다. 욕을 먹고 돌을 맞더라도 문득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신이 쏠리는 대로’ 살아보고자 했으니, 일단 내 생애 단 한 번의 원은 이룬 셈이다.
참매를 키우던 어린 시절의 고향, 맹인 김씨의 하내리를 떠난 뒤 절과 대학과 광산, 그 어느 곳에서도 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서울살이 또한 노동해방문학과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언론사 등 현장을 전전하며 간신히 딱 10년을 견뎠으나 그마저 지리산행의 전주곡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행한 세상과의 단절 혹은 무책임은 뒷골이 서늘한 해방감이었다. 그러나 해방은 해방이되 참회의 내용과 형식마저 외면하고 그저 산짐승처럼 살고픈 생존본능의 오감과 더불어 그동안 거세되었던 육감을 되살려보려는 ‘지리산 고아’로서의 처절한 해방감이었다.
내리 3년 폐가를 전전하며 상처 입은 산짐승처럼 스스로 치유하며 살다보니 어느새 업보인 ‘제1의 화살’은 등에 박힌 채로 서서히 삭아 그대로 한 몸이 되었다.
그러나 문득 고개를 들어 휘휘 둘러보니 피할 수 없는 ‘제2의 화살’이 날아오는데 이를 또 어찌할 것인가. 지리산에서 생의 한 철 잘 놀았으니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심정으로 벌떡 일어나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환경운동을 하는 지리산 지킴이를 자처하고, 토벌대와 빨치산 형제를 둔 어머니의 심정으로 정화수를 올리듯 ‘지리산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 수경 스님과 도법 스님과의 인연으로 지리산과 낙동강 도보순례와 새만금 삼보일배, 생명평화 탁발순례와 대운하반대 생명의 강 순례, 오체투지 등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했다.
그러고 보니 내게 있어 문학은 언제나 이전이 아니라 이후였다. 시는 눈앞에 있는 게 아니라 돌아보면 한참 뒤에서 발자국 위에 미아처럼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내 삶의 전위부대는 시가 아니라 물집 잡히는 발바닥 아니면 바람 속으로 내달리는 모터사이클이었다.
지리산에 와서 뭔가 한 게 있다면 그것은 단지 많이 걷고 많이 달리는 것이었다. 한반도 남쪽 곳곳을 줄잡아 3만 리 길을 걸으며 세상사 안부를 묻고, 또한 모터사이클을 타고 100만km 이상을 달리며 세상사 두두물물에게 눈인사라도 했으니 거리상으로 지구 25 바퀴 이상을 돈 셈이다. 마침내 국도와 지방도 어디든 안 가본 곳이 없는 ‘인간 내비게이션’ 수준이 되었다.
날마다 이곳저곳 걷거나 혹은 달리면서 속도와 반속도의 경계를 넘나들고,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바람의 정면으로 달리거나 혹은 측면의 바람에 온몸을 기대는 일이 어찌 시를 쓰는 일과 다르겠는가.
세상사 위험하지 않은 일은 없으니 삶의 급격한 경사를 만나면 내 몸과 마음도 그만큼의 긴장을 팽팽히 유지하고, 코너를 만나면 또 그만큼의 기울기로 유연하게 내 몸을 던져야만 비로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나갈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절절한 시 창작의 태도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할 뿐이다.
다만 가더라도 머리가 먼저 가면 교만이라는 지식의 올가미에 걸리기 쉽고, 또 가슴이 먼저 가면 격한 싸움 뒤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가더라도 먼저 발이 가고 온몸이 가고 머리와 가슴이 뒤따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긴 해도 아마 행선(行禪)의 원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눈을 들어 먼 곳을 탐색하기보다는 맹인 김씨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발바닥에 집중하는 것,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렇게 걸어보면 발바닥 아래 풀씨가 꼬물꼬물 움트고 마침내 발자국마다 꽃이 피어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 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졸시 <족필(足筆)> 전문
날마다 겨드랑이가 아닌 발바닥이 간질간질 가렵다. 나는 그동안 108마력의 슬픔으로 이 세상을 걸어서 왔다. 볼 것 안 볼 것 다 보았으니, 이제 남은 일은 내가 걷고 달려온 길 위에 쭈그려 앉은 나의 시들에게 좀 더 다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악수를 건네는 것이다. 예감컨대 나이 오십세를 넘기면서 내게도 참한 벗 하나 생길 것도 같다.
온 몸이 한 자루 붓이 되어 지리산에 그 둘레가 850리인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1년에 단 한 글자 밖에 쓰지 못한다 한들 어찌하겠는가. 매일 가는 길도 이렇게 처음 가는 길이라면 날마다 꽃길이 아니겠는가. 가다가 돌아보면 어느새 지나온 길이 아득하고, 사람의 걸음걸이가 마치 날아온 것처럼 엄청난 속도의 비보(飛步)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니, 탐진치에 걸려 나자빠지지 않는 무애의 길 위에서 돌아보면 발바닥이 곧 날개요,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득 고개를 들어 휘휘 세상을 둘러보노라면 여전히 만만치 않다. 그리하여 더더욱 리우 환경회의의 선언은 문학적으로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 나는 이 한마디와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말을 경전으로 삼아 환경운동을 넘어 생태주의로, 그리고 마침내 생명평화 운동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물론 문학적인 위치적 기반 또한 지리산으로 고정해 놓고, 지리산의 푸른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려고 애를 써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일화(世界一花)를 날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확인하고 증명하는 그 지구적 상상력의 신(神), 날마다 밤마다 가시처럼 콕콕 쑤시는 시의 맨 얼굴이 아직은 잘 보이지 않지만, 다만 그를 향해 서두르지 않고 맹인 김씨의 자세로 아주 천천히 걸어 가보는 것이다.
------------------------------------------------------------------------<산문 2>
이원규의 ‘별나무(The starry Tree)'
별 볼 일 없는 세상, 별을 보여드립니다-
하늘의 시간(天時)에 토종나무를 찾아오는 별들
지난 6년 반 동안 별이 빛나는 밤이면 지리산과 전국 오지를 찾아 밤마실을 다녔다. 청명한 밤마다 ‘별사냥’, ‘은하수 사냥’을 나갔다. 나의 흑마 모터사이클을 타고 낮에 미리 봐둔 우리 토종나무를 찾아갔다. 그 이전의 5년 동안은 안개와 구름 속의 야생화를 찾아다녔다. 그동안 나는 한반도 남쪽에서 3만 리를 걷고, 110만km를 달렸다. 이따금 사람들이 물었다. “왜 안개와 구름 속의 야생화냐? 별을 찍으려면 히말라야나 몽골에 가면 좋지 않겠느냐?”. 그럴 때마다 한 마디로 대답하기에는 심사가 좀 복잡했지만 그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별 볼 일 없는 세상, 별을 보여드립니다.”
우리는 갈수록 너무 밝아져서 별들이 잘 안 보이는 나라에 살고 있다. 모두들 말로만, 글로만, 노래로만 별들을 얘기하지 스스로 직접 보려하지 않는다. 어릴 적에는 히말라야나 몽골처럼 수많은 별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인공위성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은 너무 환하다. 밤이 없다. 빛 공해(光害)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은 이미 우리나라의 풍경이 아니다. 모두들 별을 까맣게 잊고 살아간다.
역설적이게도 ‘별들의 적은 불빛’이다. 빛은 사물을 더 잘 보이게도 하지만 때로는 공해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별이 뜨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일반적인 천문 사진이 아니라 주로 우리나라 토종나무를 중심으로 별들이 떠오르는 ‘별나무(The starry Tree)' 사진에 집중했다. 밤에도 매화며 오동나무 꽃은 피고 늦가을의 감나무들은 외등처럼 홍시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안 보인다고 아예 보려 하지 않으니 밤의 꽃나무는 그동안 없는 셈이었다. 물론 네팔이나 몽골의 별밤이 더 선명하겠지만 그 또한 상투적이지 않은가. 누구나 볼 수 있는 별밤이라면 굳이 지난한 작업을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막상 몽골이나 바이칼 호수 등에 가보았지만 구도가 그리 좋지 않았다. 한 마디로 별만 많이 쏟아졌지 심심하고 밋밋했다. 지평선 위 하늘의 3분의 1쯤은 광해로 너무 밝았다. 나무나 산 능선의 구도는 우리나라가 훨씬 좋았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낮의 사진은 내려놓았다. 오히려 잘 안 보이는 밤의 별사진에 집중했다. 카메라가 찍어주는 낮 사진, 수동적인 자세의 사진이 아니라, 내가 카메라를 제어하는 능동적인 자세, 그 수많은 실패가 더 소중했다. 밤눈에 익숙해지면서 그 희미한 빛과 그늘을 빨아내고 보듬어 안았다.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별들을 잊고 사는 이들에게,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천년 별빛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일단 별과 더불어 주 피사체가 되는 ‘토종나무 모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낮에 모터사이클을 타고, 때로는 도둑놈(?) 취급을 받으며 전국의 오지를 어슬렁거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맑은 밤이면 4월부터 8월까지 선명한 은하수가 떠오르고, 수시로 별똥별들이 쏟아졌다. 지난 5년반 동안 밤마다 반경 40km 이내에 도시가 없는 오지들을 찾아다녔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나 이미 유명한 나무들은 절대 찍을 수 없다. 가까이 외등이 켜져 있거나 나무를 보호한답시고 주변에 철조망이나 간판 등이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프레임 속에 나무 그 자체의 온전한 모습이 훼손되니 제대로 찍을 수 없다. 그리하여 더 오지의 유명하지 않은 ‘왕따나무’를 찾아나서야 했다. 도시나 고속도로 등의 빛 공해가 없는 지역, 가까이 시골 마을의 가로등 불빛마저 가까이 침범하지 않는 곳에 홀로 서 있는 감나무, 오동나무, 매화나무, 자작나무숲, 산벚나무, 소나무, 능수버들, 수양벚꽃, 수달래 등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이런 나무들을 찾았다고 해서 모두 별나무 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막상 다시 밤에 찾아가보면 어디선가 안 보이던 불빛이 급습한다. 더구나 비가 오거나 흐린 날, 달빛 좋은 밤에는 아예 포기해야 한다. 날마다 수시로 기상청 예보를 주시하며 그 옛날 농부나 어부처럼 육감으로 밤하늘을 보다 보면 한 달에 겨우 사흘 정도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런 날이 오면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밤을 지새워야 한다. 미리 봐둔 나무를 찾아가 벅차오르는 감흥을 억누르며 카메라를 잡고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어둡다 보니 카메라 초점 잡는 것도 쉽지 않고 모든 것을 수동조작으로 해야 하니 실패 또 실패, 새로운 세팅을 하며 찍은 뒤에 사진을 확인하는 등 무한 반복을 해야 한다. 산짐승들을 친구삼아 나만의 별나무 사진 노하우가 축적됐다.
인생도 그렇듯이 화무십일홍이다. 열흘 이상 붉은 꽃이 없다는 옛말처럼 환하게 꽃이 피는 별나무 사진을 찍으려면 같은 모델을 두고도 적어도 3-5년 정도 걸린다. 일단은 꽃이 피는 나무를 찾아야 하고, 그 나무가 꽃을 피울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 꽃이 다 지기 전에 별들이 쏟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늘의 시간인 ‘천시’(天時)가 아닐 수 없다. 꽃이 피었다가 질 때까지 밤마다 찾아가 기다려야 한다. 날이 흐리거나 달이 떠오를 무렵 꽃이 피면 너무나 아쉽지만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감나무 또한 격년결과의 해거리를 하니 실패하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안개와 구름 속의 야생화처럼 또 하나의 간절한 기다림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지리산 오지마을의 감나무를 찾아갔다. 해발이 높다 보니 영하의 밤길, 왕복 600리 길이었다. 이 감나무를 찍다가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습도가 낮고 추운 밤의 별들보다 습도 65% 정도의 밤에 찍은 별들이 더 잘 나온다는 사실이다. 영하 5도, 습도 40% 정도의 쾌청한 밤의 별들은 파란 하늘 속에서 거의 같은 크기와 같은 빛의 세기로 나왔다. 그런데 살짝 안개가 낄 정도의 밤에는 굴절 현상 때문인지 별들의 크기와 빛의 세기가 저마다 다르게 찍혔다. 큰 별은 더 크게, 밝은 별은 더 빛나는 것이었다. 이 또한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천시의 기운’이었다.
대마도의 반딧불이를 본 뒤 너무 부러워 밤마다 지리산 골짜기를 다 뒤진 적도 있다. 결국 반딧불이와 별과 은하수를 2년 만에 사진으로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별비 내리는 겨울 폭포. 영하 7도의 밤에 물보라 맞으며 3년 동안 집중해 겨우 1장을 건진 적도 있다.
나는 몽골, 히말라야, 바이칼 호수 알혼 섬,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이 부럽지 않다. 한국 최초의 별나무 사진이다. 그것도 우리 토종나무이니 세계 최초의 별나무 사진인 셈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미천한 외국어실력으로 구글 검색하며 해외사진들을 일별해보니 딱 두 장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바오밥 나무 위로 떠오른 은하수 사진이었다. 그리고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소개된 적이 있는 별이 쏟아지는 폭포사진이었는데, 나와 비슷한 시기인 3년 전의 작품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별사진의 디테일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아보였다.
굳이 그 먼 곳, 먼 나라에 가지 않고도 나는 ‘별소년’, ‘은하수 소년’으로 살았다. 때로는 ‘별나무’ 대신 은하수 아래 내 몸을 밀어 넣었다. 은하수가 희미해지는 새벽 4시까지 옷을 훌훌 벗고 20초씩 연이어 한밤의 춤을 추고 또 추는 밤도 있었다. 5년 반 동안 온몸으로 집중했던 별나무가 단 33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갈 길은 멀지만 여한이 없다. 나 홀로 밤의 별 농사가 흉년인 듯 풍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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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편>
별다방
저 멀리 빛난다고 다 별빛은 아니었네
점촌역전 골목의 지하 다방
그녀의 청보라 스웨터에 별들이 반짝거렸지
한번 불붙으면 펄펄 뛰는 팔각 성냥갑
달달하게 녹기 전에는 날 세운 각설탕
오빠야, 내도 차 한 잔 마실게
옆자리 앉자마자 허벅지 쓰다듬으며
근데 얼굴이 캄캄한 오빠는 뭐 하는 사람?
나야 뭐, 지하 막장에서 벼, 별을 캐지
아, 죽어야만 2천만 원짜리 그 막장 꺼먹돼지!
그래 그래 별마담, 커피 두 잔 부탁해
철없는 시인이 되었다가 폐광하고
경제학 원론을 불태우던 그 시절
지하 1층 별다방에서 별똥별을 보았지
밤마다 9톤의 별들에게 다이너마이트 터뜨리며
지하 700미터 막장에서 운석을 캐냈지
오후 네 시에 팔팔 항목으로 들어가
자정 무렵 시커먼 포대자루로 기어 나오면
코피처럼 폐석처럼 쏟아지던 별빛들
세상도 나도 너무 밝아져 다 식어버렸네
지천명 넘어서야 밤의 지리산 형제봉
해발 1100미터 산마루에 홀로 누워
아득하고 아련한 별빛들을 소환하네
아주 가까이 빛나던 것들은 모두 별빛이었지.
달빛을 깨물다
살다보면 자근자근 달빛을 깨물고 싶은 날들이 있다
밤마다 어머니는 이빨 빠진 합죽이였다
양산골 도탄재 너머 지금은 문경석탄박물관
연개소문 촬영지가 된 은성광업소
육식공룡의 화석 같은 폐석더미에서
버린 탄을 훔치던 수절 삼십오 년의 어머니
마대자루 한가득 괴탄을 짊어지고
날마다 도둑년이 되어 십리 도탄재를 넘으며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청상의 어금니가 폐광 동바리처럼 무너졌다
하루 한 자루에 삼천 원
막내아들의 일 년치 등록금이 되려면
대봉산 위로 떠오르는 저놈의 보름달을
남몰래 열두 번은 꼭꼭 씹어 삼켜야만 했다
봉창 아래 머리맡의 흰 사발
늦은 밤의 어머니가 틀니를 빼놓고
해소 천식의 곤한 잠에 빠지면
맑은 물속의 환한 틀니가 희푸른 달빛을 깨물고
어머니는 밤새 그 달빛을 되새김질하는
오물오물 이빨 빠진 합죽이가 되었다
어느새 나 또한 죽은 아버지 나이를 넘기며
씹을 만큼 다 씹은 뒤에
아니, 차마 마저 씹지 못하고
할 만큼 다 말한 뒤에 아니, 차마 다 못하고
그예 들어설 나의 틀니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어머니 틀니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장례식 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털신이며 속옷이며 함께 불에 타다 말았을까
지금도 무덤 속 앙다문 입 속에 있을까
누구는 죽은 이의 옷을 입고 사흘을 울었다는데
동짓달 열여드렛날 밤의 지리산
고향의 무덤을 향해 한 사발 녹차를 올리는
열한 번째 제삿날 밤이 되어서야 보았다
기우는 달의 한쪽을 꽉 깨물고 있는, 어머니의 틀니.
시인 이원규(李元圭)
1962년 경북 문경군 마성면 하내리 출생.
시집 『돌아보면 그가 있다』 외 6권, 산문집 『지리산 편지』외 5권.
지난해 신작시집 『달빛을 깨물다』, 시사진집『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출간.
제16회 신동엽문학상, 제2회 평화인권문학상 수상.
인사동마루갤러리 초대사진전 등 전국 순회 5회 사진전 개최.
주소: 57709 전남 광양시 다압면 토끼재길 326 <예술곳간 몽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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