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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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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 견훤 탄생지가 어디인가?
견훤 탄생지를 금하굴이 있는 가은읍 갈전리로 단정하고 대부분 지렁이 설화(蚓子說話, 蚯蚓說話, 夜來者說話)를 인용하고 있다. 농바우가 있는 농암면 갈동리와 광주광역시(무진, 무진주) 북촌도 같이 언급되고 있지만 문경지역은 탄생과 출생 관련 유적이 많은 반면, 광주는 삼국유사 기록에만 의거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공감대가 적은 것 같다. 하지만 그동안 견훤 탄생지에 대한 조사 및 발굴이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이번 새로 밝혀진 추심사 등 관련 고문헌 등을 보면 그간 조사가 생각보다 부실했음에 실소하게 된다.
그런데 금하굴과 광주 북촌은 지렁이 설화, 농바우는 천마설화가 유래되고 있고, 그 유적으로는 자연 토템(totem)인 금하굴과 농바우 등이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금하굴 설화는 견훤이 그곳에서 탄생한 문헌적 기록이 없고 1946년 마을 사람들이 굴을 판 후 구전되는 이야기를 적당히 끌어다 붙인 수준이다. 이에 반해 농바우는 농암이라는 지명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래 사용되어 오고 있고, 옥황상제가 내린 벌로 아비와 구호라는 실명을 가진 두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져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어도, 혹자는 고인돌일 가능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전설이나 지명의 형성은 사실 여부보다 인간이 개입된 신화적 재현으로 인해 얼마든지 가공 변이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갑론을박보다는 얼마나 어떤 것이 설득력을 얻고 인과관계가 성립되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문헌에서 견훤이 추심사(推尋寺) 뒤편 원추리밭에서 지렁이가 발견되었어도, 그 인근 마을이 견훤 탄생 유적지라는 기록으로 인정받을지 여부이다. 18세기 중엽 제작된 고지도인 <영남지도>, <해동지도>, <광여도> 등에서는 추심사와 견훤 궁기 마을이 같은 위치에 있음이 쉽게 확인된다. 통일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추심사는 탄생설화 외에도 견훤이라 이름을 지은 이유까지 확인되고 있어, 이는 구전을 채록한 다른 자료보다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요즘 지자체들이 저마다 후백제 역사 복원을 위한 플랜을 시행해 가고 있어 이번 새롭게 찾아낸 조선 전기의 <견첩록>과 한천사에 배향된 성만징의 <추담집>, 그리고 문경현의 역사를 기록한 <문경부지>의 내용을 관심 있게 살펴본다면 견훤 탄생지 문제가 상당히 바르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견첩록(見睫錄)>은 조선시대사 문헌으로 조선 전기의 인물 제도 문물 풍습 등을 기록한 개설서이고, 6권 6책의 필사본으로 편자와 편집 연대는 미상이지만 조선시대 유서(類書)로 사회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또 <추담집(秋潭集)>은 농암 한천사(寒泉祀)에 배향된 조선 후기 학자인 성만징(1659~1711, 號 秋潭)의 시(詩) 서(書) 기(記) 제문 행장 서찰 등을 엮어 1926년에 간행한 시문집이고, <문경부지(聞慶府誌>는 조선 후기인 1892년 문경현에서 엮어낸 지방의 역사 기록이다. 따라서 이 문헌들을 통해 견훤 탄생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문경(聞慶)이 무진(武珍)이다
武珍 聞慶 號 北村. 有一富人有女甚美. 謂父曰. 每有一紫男衣到宿交婚. 父曰 以絲貫針剌其衣女從之. 至明尋絲於西北墻下. 針剌於大蚯蚓之腰女. 因有妊生甄萱. 勝覽.
무진(일명 문경). 북쪽 마을에 부잣집에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이르되 “매일 밤 자색 옷을 입은 남자가 와서 교혼을 하고 갑니다.” 아버지가 바늘에 실을 꿰어 옷에 꽂으라 하여 그렇게 하였다. 다음날 그 실을 따라 가니 서북쪽 담장 아래 큰 지렁이가 바늘에 찔려 죽어 있었다. 이로 인해 태기가 있어 낳으니 그가 견훤이다. 승람
위 내용은 <견첩록>에 수록된 견훤탄생 설화로 여기서 <무진>을“문경의 별칭”이라 쓰고 있고, 실을 따라가 보니 지렁이가 죽어 있는 곳은 <북쪽>이 아닌 <서북쪽> 담장 아래로 깊은 굴이 아니며, 이 글의 출전은 지리지 등에서 명승지를 뜻하는 <승람(勝覽)>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무진에 대해서는 광주의 옛 도시로만 이해하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광주 북촌”과 다른 문헌에서 나오는 무진, 무진주를 동일시하여 지금의 광주광역시라고 무조건 단정해 왔다.
하지만 견첩록 자료에 의하면 <무진이 문경의 별칭>이라 하므로 견훤 탄생지가 광주일 수도 있다는 견해는 힘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사관들이 독립성과 비밀성을 부여받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작성한 실록이라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옳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삼국유사에는 <광주 북촌>으로 쓰고 승람 등 다른 곳에서는 <무주, 무진주>로 쓴 이유가 뭘까? 그것은 무주가 견훤이 후백제 건국이라는 혁명적 신화를 이룬 곳이자 새 나라를 창업한 곳이므로 그의 영웅적 신화의 시작이 무주 북촌에 생겨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주 토호인 <지훤(池萱)>이 견훤의 사위가 되고 견훤에게 충성 서약을 하며 이름을 견훤과 같은 훤(萱)자로 바꾸고 그를 적극 지지하였던 것이리라.
그랬으니 상상하지 못할 짧은 시간 내 탁월한 영도력으로 건국 시조가 된 견훤의 위업을 고려에서는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기에 문경의 지렁이 설화를 광주에 끌어다 붙였을 것이다. 당시 고려 사관들은 견훤 탄생지가 실제는 문경이지만 견훤이 득세한 특별한 땅을 깎아내리고자 광주 북촌으로 왜곡했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어느 세계사에서도 창업 군주의 신화를 이처럼 미물로 폄훼하는 것은 극히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이는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의도적인 견훤 말살인 것이다.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까지도 견훤이 인륜의 도를 저버리고 신라를 배반한 뒤 백제 땅으로 가서 세우지 말아야 할 나라를 세웠다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일관했다.
조선 성종이“전라도는 옛 백제 땅인데 백성들이 견훤이 남긴 풍습을 이제껏 모두 고치지 못하였으므로 그 풍습이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자 강원도 관찰사 이극기가 “견훤 이후로 고려 오백 년을 지내고 조선조가 되어서도 거의 1백년이 되었으나 남은 풍속이 아직 없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다 완악하니 명심하고 교화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는 <세종지리지> 기록을 보면 얼마나 견훤을 부정적으로 보았는지 알 수 있다. 견훤 통치 35년이 전라도 지방의 특별한 풍습을 만들고 그렇게 수백년을 내려왔다면 그것은 완악함이 아닌 주체성이 강한 국민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을 따라 간 곳은 북쪽이 아닌 서북쪽이라는 것도 방향 자체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북쪽이라 하면 광주 북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기 쉽지만, 서북쪽은 왕궁이 있던 고기(古基, 이터골, 옛터골) 마을과 의상암과 의상대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서북쪽이란 내용이 설화 속 이야기에 구체성과 정확성을 부여해 준다는 점이다. 문경지(聞慶誌)에서는 “중궁 서남쪽 골짜기에 큰절이 있었고, 세로 40cm x 가로 30cm의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절골에는 축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절골 서북쪽에 본궁이 있었다는 상궁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견훤 탄생의 추심사 설화가 더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승람은 동국여지승람, 신증국여지승람, 환여승람 중 하나로 보이는데, 견첩록에서 승람이라고 출전을 밝힌 것은 이 내용이 기록자가 야사를 적당히 옮겨 쓴 것이 아니라는 입증으로 보인다.
□ 궁기에는 추심사(推尋寺)와 의상암(義相菴)이 있다
曾聞左右有遊華山之意今無難動之事否若於明早取路于楮谷抹馬于達川村越黃嶺三峴直入于聞慶內西里嚴孝信家問我行色則可以相會矣此則今日發向內西面下寒泉村明日優遊進士巷宮基推尋寺等處又明日直上華陰十餘里坐義相菴以待高筇到共觀眼底江山又明日往松面覽所占山數處因遊仙遊洞復下龍湫宿于雙龍菴又取路于多樂洞出于淸溪寺以爲分袂之地首尾可費七八日以此俶裝只佩錢而發則無驂亦輕便矣然此上義相菴未聞筇音則以未駕知之獨向松面然去年見華陽壁上一故畫則乃義相菴圖也默而識之似非偶然近又聞僧徒之言則義相勝於雙龍道藏今日吾輩一上遊目安知非奉承老先生之遺意耶翛然一出幸甚
좌우(친구 또는 동료)께서 화산을 유람할 뜻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었습니다. 지금 움직이기에 어려운 일은 없으신지요? 만약 내일 아침에 저곡(楮谷)으로 길을 잡아 달천촌(達川村)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황령(黃嶺)의 세 고개(三峴)를 넘어 문경(聞慶) 내서리(內西里) 엄효신(嚴孝信) 집으로 곧장 들어와 내 행색을 묻는다면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此)는 오늘 내서면(內西面)으로 출발하여 한천촌(寒泉村)에 내려가 자고, 내일은 진사항(進士巷)과 궁기(宮基), 추심사(推尋寺) 등지에서 여유롭게 노닐 것입니다. 그다음 날에는 화음(華陰)으로 십여 리를 곧장 올라가 의상암(義相菴)에 앉아 귀하의 지팡이 소리(도착)를 기다렸다가, 눈앞의 강산을 함께 구경하고자 합니다.
그다음 날에는 송면(松面)으로 가서 점찍어 둔 산 몇 곳을 관람하고, 이어서 선유동에서 유람한 뒤 다시 용추(龍湫)로 내려와 쌍룡암(雙龍菴)에서 숙박할 예정입니다. 또한 다락동(多樂洞)으로 길을 잡아 청계사(淸溪寺)로 나가는 것으로 이별의 장소를 삼으려 하니, 처음부터 끝까지 7~8일 정도 소요될 것입니다.
이 일정에 맞춰 행장을 꾸리시되(俶裝), 단지 돈만 차고 출발한다면 말이나 하인이 없어도 가볍고 편안할 것입니다. 다만 의상암(義相菴)에 올랐는데도 그대의 지팡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오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나 혼자 송면(松面)으로 향하겠습니다.
지난해 화양(華陽)동 벽 위에서 옛 그림 하나를 보았는데 바로 의상암도(義相菴圖)였습니다. 마음속으로 그것을 기억해 두었으니 이번 유람이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최근 승려들의 말을 들으니 의상암 경치가 쌍룡(雙龍)이나 도장(道藏)산보다 낫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한번 올라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어찌 노선생님(先賢)의 남겨진 뜻을 받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나서보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 서찰의 출전은 <추담집(秋潭集)>이다. 1710년(경인년) 성만징(1659~1711, 號 秋潭, 한천사 배향)이 그의 친구인 송진숙(晉叔 :字, 본명 康錫, 1663~1721, 산앙사山仰祀 배향)에게 화산 유람을 권했는데, 당시 추담은 문경 쌍룡에 거주하고, 송진숙은 상주 내서에 있어 추담이 유람 일정을 진숙에게 알려주며 만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다. 편지를 쓴 성만징은 “대학을 3백번 읽고 3개월을 정좌 끝에 우음(偶吟)이라는 시를 썼다.”는 선비로, 기축년(己丑年, 1709년 숙종 35년) 문경(聞慶)의 쌍룡동(雙龍洞)에 새로 터를 잡아 옮겨 기호(畿湖)의 사우(士友)들과 계를 맺고 예의(禮義), 충신(忠信), 주궁(賙窮, 곤궁한 이를 도움), 휼상(恤喪, 상사喪事)에 서로 도우는 등의 조항을 석담 향약(石潭鄕約)에서 본 떠 만들었던 인물(국역 국조인물고)이기에 이 편지의 신뢰도는 더 높아진다.
두 사람은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문하생이자 상주 내서 출신 선비다. 첫날 문경 내서리 엄효신 집이나, 아니면 넷째 날쯤 추심사가 있는 궁기 의상암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나온다. 상주 내서에서 시작해 화서를 거쳐 황령재 3개를 넘은 다음 문경 내서(內西)에서 일박한다. 그리고 다음날 한천촌(寒泉村), 궁기 추심사(推尋寺), 의상암(義相菴), 괴산 송면(松面), 그리고 추담의 주거가 있는 내서 쌍용암(雙龍菴)에서 일박한 후 다락동(多樂洞), 상주 청계사를 지나는 경로다. 십승지 중 하나로 꼽는 화산(청화산)을 둘레길 형태로 한바퀴 도는데 7~8일이 소요되는 노정을 제안 및 안내하고 있다.
이 노정에서 거론되는 추심사와 의상암이라는 절이 그동안 묻혀있던 견훤 탄생지 파악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지명도 있는 두 선비에 의해 유람할 가치가 있는 유명한 절인 추심사가 궁기에 소재하고 있고, 갓바우재를 넘어가는 그 위쪽으로 아주 전망 좋은 의상암이 위치했다는 게 확인된다. 의상암을 가기 위해서는 <화음(華陰)>에서 곧장 십여리를 올라갔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화음은 “화산(華山, 청화산)의 제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뜻하므로 당시 궁기 마을에는 서당이 있어 학문을 도야하는 선비들의 집성촌이 있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의상암(義相菴)>에는 승려가 있고 의상암의 경치가 쌍용구곡이 있는 쌍용암이나 우복동천길이 있는 도장산보다 낫다고 적고 있으며, 화양동에는 <의상암도(義相菴圖)>라는 그림까지 있으니 어느 정도의 승경인지 가늠 된다. 이 기록은 그동안 논란이 있는 견훤 탄생지가 굴이나 바위가 아닌 원효대사가 지은 추심사로,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의상암이 불당골에 있었고, 궁기에 선비들이 학문을 도야하는 서당 형태의 집성촌이 있었다는 사실은 견훤 탄생역사와 궁기 문화를 이해하고 뒷받침하는 중요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 궁기에는 견훤탄생 <지렁이 설화>가 있다
人物新羅阿慈介-加㤙縣人以農夫起家爲將軍有四子甄萱其一也 初萱生父耕野母餉之置于林下虎來乳之聞者異之△古記武珎北村有一女未嫁時謂父曰每有一紫衣男來交父試使以線貫針刺其衣女從之至明尋線於北墻下針刺大蚯蚓之腰因有娠生萱△俗傳尋線於推尋寺積尾萱草中故称甄萱未詳孰是
인물 신라아자개- 가은현(현 경북 문경 가은·농암) 사람으로서 농부로 자수성가하여 장군이 되었는데, 네 명의 아들이 있었고 견훤은 그중 한 명이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남편에게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 아래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다른 기록인)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무진 북촌에 한 여인이 있었는데 시집가기 전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번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꿈에) 나타나 저와 관계를 맺고 갑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시험 삼아 딸에게 바늘에 실을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게 하였고, 딸이 그 말대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실을 따라가 보니 북쪽 담장 아래에 있는 큰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이로인해 임신하여 견훤을 낳게 되었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실을 찾아간 곳에 추심사라는 절의 적미(積尾) 부분이 원추리(萱草, 훤초) 풀 속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견훤이라 불렀다고도 하지만, 어느 기록이 옳은지는 확실하지 않다.
---< 문경부지(聞慶府誌), 1892년 >
“견훤의 어머니가 처녀 시절에 가은의 가동 아차리(加東阿义里)에 살았는데, 미남 소년이 밤을 타서 와 사통하고 새벽이 되면 홀연히 가버렸다. 처녀가 괴이히 여겨 문의 자물쇠를 굳게 잠갔으나 오고 감이 여전하였다. 처녀가 명주실로 그 허리를 묶고는 새벽이 되어 가서 찾으니 사면이 깊은 계곡 중의 묵은 옹기(甄) 속으로 들어가, 옹기 뚜껑을 열고 보니 10여 자나 되는 거대한 지렁이였다. 이 절이 추심사(推尋寺)란 이름을 얻은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니랴.”
---< 상주 구비문학 설화집 >
위 <문경부지>와 <상주설화집>에서 인용된 내용에는 견훤이 추심사에서 태어났으며, 실을 따라가 보니(推尋) 지렁이가 옹기 속에 있어 그의 성은 견(甄: 질그릇), 지렁이가 원추리 풀 속에 있어 훤(萱: 원추리)으로 지었다는 기록이 매우 그럴듯하다. 추심사가 고지도 여러 곳에서 궁기마을로 표기되어 나오지만 그동안 견훤이 궁기에서 태어났다는 문헌상의 기록 확인은 이번이 최초이다. 고려 시대 이전의 상주 문학은 구비문학의 범주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단계였으나, 견훤(甄萱) (867~935)과 관련된 설화는 구비문학의 백미로 꼽힌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설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다 <추담집>에 기록된 서찰에 나오는 성만징과 송진숙은 괴산 화양동에서 송시열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한 수제자이고 당대에 크세 명성을 얻었던 선비였다. 그러므로 이곳 화산 화양 화음 주변 지리와 문물 등에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이들의 서찰에서도 경로와 지명 등에서 모순점이 발견되지 않아 그저 현대판 지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편지를 퉁해 궁기 마을 중궁에 있었다는 추심사의 절 위치를 어느 정도 확정할 수 있다. 궁기리 중간 마을인 중궁에서 좌측 골짜기로 들어가면 <절골>이 나오고 그곳에 있는 절이 바로 <추심사>인 것이다. 문경지 등에서는 원효가 지었다는 절이 조선 전기까지 절골에 있었고, 추담집에서는 두 선비가 추심사를 유람한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적어도 성만징이 편지를 썼던 해인 1710년까지는 분명히 추심사가 존립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절골에서 청화산 방향 서쪽을 바라보면 알처럼 생겼다는 <알봉>, 그 봉 아래 <큰절님이골 (큰절너머골)>이 있는데, 여기서 큰절은 추심사를 의미하며, 절골 앞에 있는 산을 <절안산>이라 지칭함은 여기서 절도 추심사가 있었다는 또 다른 입증이다. 이 골에서 능선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우측으로 국신(國神: 고수, 國仙 : 화랑우두머리)의 뜻을 내포한 <국시말골>은 견훤이 무예의 고수거나 화랑도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정상쪽으로 더 올라가면 청화산과 조항산 사이 백두대간 능선 상에 암릉 구간이 있는데 이곳이 <원효대>로 판단된다. 그래서 갓바우재에서 조항산 방향 능선으로 가면 의상대가 나오고 그 아래 의상폭포와 의상암이 있으며, 이 고개를 넘어가면 의상저수지(현 송면저수지)와 의상골과 입석리가 나오는 길이 그려진다.
<교남지, 환여승람, 문경지> 등에 의하면 선조 때 도찰방을 지낸 후 효도와 학문에 힘썼던 김이원(金理元, 1562~1632)이 만년에 조항산 능선 암봉에 <의상대(義尙臺)>를 쌓았다. 그 아래로 의상폭포(4m)가 있고, 옆으로는 <하강정(下江亭)>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어 의상대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 <청조향람>에 의하면 “의상대가 청화산 능선에 위치하며 산수가 아름다워 고승이 수도하기에 알맞아 의상대사가 일시 수도한 곳으로 의상대에서 원효와 의상이 수시로 만나 불교 포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두 분은 축지법을 잘했으며 의상은 하늘이 내려주는 음식을 받아먹기만 하여, 원효는 의상에게 놀면서 천공을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고 나무랐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기록들을 종합하면 상궁 햇갓골(해가 일찍 돋는 방향)에서 갓바우재 정상을오르면 그 좌우에 원효대와 의상대가 있고, 의상대 아래 의상폭포와 하강정, 그리고 <의상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그곳을 <불당골, 미륵골>이라 불렀다는 말이 성립된다. 다시 말하면 추심사는 중궁 절골에 있으며 그곳에서 조금 오르면 원효대가 나오고, 의상암은 상궁 불당골에 있어 그곳에서 오르면 의상폭포와 의상대를 만난다. 대(臺)는 바위꼭대기의 넓고 편평한 곳으로 순우리말로는 너럭바위라 부르며 이런 대가 자리한 곳은 조항산과 청화산 사이의 암봉을 말한다. 성만징이 추심사를 먼저 구경한 후 다음 날 전망이 좋은 의상암에서 송진숙이 올라오는 발자국 소릴 듣는다고 했으니 글의 내용과 길의 수미가 상응하므로 그동안 전설로만 믿어오던 이야기들이 바르게 정리 된다.
□ 궁기는 큰 인물이 나는 길지다
궁기는 지리적으로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요한 지역인 데다 마을 뒤편인 북쪽은 백두대간으로 막혀있고 앞쪽으로는 산들이 옷깃을 여민듯한 지형이어서 이 골짜기에 왕궁이 들어서고 군사들이 주둔하기 좋으며 절이 들어서면 수도하는 도량으로 적합한 곳이다. 청화산(靑華山)과 조항산(鳥項山) 품에 안겨 있는 고을을 두 산의 첫 글자를 따 <청조(靑鳥)의 고장>이라 부른다. 청조(靑鳥)는 ‘파랑새’를 뜻하며, ‘좋은 소식·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한국 민속·문학에서는 서왕모(西王母)와 연결되어 새가 음식을 가져오거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신화적 존재로 등장한다. 청조지신(靑鳥之信)은 “파랑새가 날아다니며 주는 소식”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의 파랑새 역할의 인물이 누구일까를 찾는다면 그가 하늘이 내린 견훤이 아니겠는가.
견훤은 15세가 되자 장도에 오르게 되는데 당시 왕경(경주)으로 가서 왕실 근위대로 들어간다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가 무예나 수련이 출중하다고 해도 성골이나 진골이 아니라면 상당한 세력을 가진 가문 출신으로 보인다. 추심사가 있는 절골 위의 <국시말골>은 그가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國仙)>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는다. 게다가 농암 칠봉산에는 조자룡 동굴이 있고, 그 부근으로 화랑 훈련장이 있었다는 <선곡(仙谷)>과 화랑도들이 즐겨 찾았다는 <은선대(隱仙臺)>가 있어 견훤이 화랑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청화산(970m)과 시루봉(876m)과 연엽산(791m), 조항산(951m)과 둔덕산(969m)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 중심은 추심사가 위치한 절골이다. 절골은 연엽산 2.9km, 시루봉 2.2km, 청화산 2.5km, 조항산 2.5km, 원적사 2.8km, 마고할미바위 3.8km, 둔덕산 4.7km의 거리를 두고 위치한다. 그도 그럴 것이 청화산과 조항산은 청조를 부리는서왕모(西王母) 기운으로, 조항산에서 둔덕산 방향으로는 창조의 여신인 마고신(麻姑神)이 마고할미통시바우로 자리하고 있어 이곳을 오면 특별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특히, 절골은 십승지의 기운까지 품고 있어 병화가 없고 큰 인물이 난다는 설화가 예로부터 유래되고 있다.
조항산은 새과 같이 생긴 산이라 하여 <새목산>이라고 부르며 독수리가 비상하는 기운을 가졌다고 한다. 조항산 정상쪽 암봉을 정면에서 보면 독수리의 머리, 햇갓골에서 보면 큰 바위 얼굴로 보이고, 청화산 방향 측면에서 보면 위엄 있는 숫사자가 발을 앞으로 내어 앉아 있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조항산을 ‘갓바위봉’이라 부르는데, 옛날 천지개벽으로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정상 바위 꼭대기만 ‘갓(冠帽)’만큼 물 위로 나와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최후의 심판 끝에 남은 성지같은 곳이다. 의상대 부근 능선으로 사형제 봉이 있는데 이 봉우리가 네 명의 견훤 동생을 일컫는다고 한다. 견훤은 위쪽의 큰 바위 얼굴이고, 네 개의 봉우리는 능애장군, 용개장군, 보개, 소개장군으로 이곳은 건국시조 1명, 장군 3명의 큰 인물이 난 길지라는 곳이다. 5형제는 용감했으나 끝내 하늘이 내린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통일을 완수하고자 왕건에게 귀부를 선택했던 건 자신의 욕심보다 하늘의 순리를 따른 것이 아니겠는가.
조항산 정상 밑에는 천하 명수가 있는데 수량이 일정하며 이 약수는 부정한 사람이 마시면 효험이 없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큰 효험을 본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조항산록 고모령은 조선 중기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가장 빠르고 산적이 없는 편한 고개로 이 고개를 넘어간 선비들의 과거 급제율이 새재보다 높았다(괴산誌)고 전한다. 그리고 추심사가 자리한 절골에는 예로부터 신성한 곳으로 인식되어 사냥꾼들이 이 골짝에서는 짐승 한 마리도 잡아 본 적 없고, 이 골짝을 벗어나야만 집승이 잡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 전시 때도 당시 마을 인구가 750여 명이 되었으나 전사자가 단 1명도 없었다고 한다. 조항산 정상에서 중궁 250m까지는 고도차가 700m에 이르러 평지 발달이 미흡하여 골이 깊고 논밭이 많지 않아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곳이라 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큰 화를 한 번도 당한 적 없어 세상 어떤 곳보다 가장 살만한 고을이라 여겼다. 주막이 있고 장이 열렸어도 도둑이 없고 전쟁 교통로로 이용되지도 않았으며, 이 고개를 중심으로 국경을 마주하여 아무나 쉽게 범하지 못하는 신성하고 특별한 완충지대같은 곳에서 견훤이 태어났다는 건 필시 하늘이 한반도의 통일 성업을 이루기 위해 내린 인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최초로 발견된 견훤 문헌의 가치
이번 새로 확인된 견훤 관련 문헌은 <견첩록>과 <추담집>과 <문경부지>다. 그 외에 상주 구비문학 설화에 나오는 견훤설화는 종래에 알려진 지렁이 설화와는 또다른 <옹관묘> 설화의 양상을 띤다. <견첩록>에서는 문경의 별칭이 무진이라는 사실을 통해 견훤이 문경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므로 이제는 그가 광주에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 견첩록에서는 <무진 북쪽>이지 <광주 북촌>으로 기록하지 않았고, 이 설화의 출전이 삼국유사의 인용이 아닌 <승람>이라고 쓴 것이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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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담집>에서는 견훤이 탄생했다는 추심사(推尋寺)가 궁기 절골 소재가 확인되고, 손꼽히는 경승인 <의상암(義相菴)>은 궁기 불당골에 있었으며, <화음(華陰)>은 궁기 고을에 선비 집성촌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문경부지>에서는 광주 북촌 대신 <무진 북촌>이 등장하고, 지렁이 설화 장소가 추심사 뒤뜰 원추리 풀속이므로 <훤(萱) : 원추리>라 이름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상주구비문학>의 설화에는 지렁이가 옹관묘 속에서 발견되어 질그릇 견(甄)씨로 성을 지었고, 실을 따라가 지렁이를 발견한 곳이 <금하굴>이 아닌 <깊은 계곡>에서 찾았으므로 그 절 이름을 <추심사>로 정한 이유가 확인된다.
이를 종합하면 삼국유사에 언급된 견훤의 광주 북촌 탄생설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견훤이 태어난 곳은 추심사로 궁기에서 태어났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런데 견훤의 고장 농암에는 두 개의 견훤 탄생 설화가 존재한다. 그것은 천마설화와 지렁이 설화인데, 국조신화로는 누구나 <천마실화>를 인용할 것이나 <지렁이설화>는 견훤을 숭상하는 것에 대해 고려와 조선시대의 핍박을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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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견훤설화는 갈동리 농바우의 <천마설화>로 널리 알려졌으나 고려에서 견훤 숭모를 탄압하였기에 존숭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궁기 추심사의 <지렁이 설화>로 변하였을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거대한 옹관묘(권력자의 무덤) 속에서 10자 크기의 지렁이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 위상과 통치 기반이 최고 권력자의 가문이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는 “지렁이같은 너 야곱아”라고 그를 뭇사람에게 밟히는 미물로 언급했지만 선지자 시대에 강국에 둘러싸여도 하늘이 도와 지렁이같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믿음의 조상이 된 만큼 견훤이 지렁이설화로 아무리 평가절하 한다고 해도 그가 하찮은 미약한 존재로 전락하겠는가.
하늘은 한반도 통일을 위해 천마의 기상을 타고난 견훤이라는 영웅을 내린다. 그러나 그는 천마의 기운을 품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바우에서 얻은 명마를 자신의 실수로 목을 치는가 하면 영도의 절영마를 왕건에게 선물한 뒤 되돌려 받았으나 그의 천기는 쇠하고 만다. 자신의 말에게 대동강물을 먹이고 싶다며 통일의 꿈은 버리지 않았으나 종국에는 피를 흘리지 않고 스스로 후백제의 제단을 고려로 넘긴다. 세계 역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견훤처럼 설화가 많은 국조왕은 없었으니 출생 성장 설화가 10가지(남원, 옥구, 정읍, 함평, 상주, 안동, 김해 등), 유적과 지명 전설 8가지, 성(城)에 대한 전설 16가지와 기타 전설 16가지를 합하면 무려 50가지(한국구비문학대계) 설화가 전해지는 것은 그만큼 그의 영웅적 기질과 능력과 인품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 맺음말 : 견훤은 궁기 추심사에서 시작된다
견훤이 태어난 867년, 지금으로부터 천년도 더 지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밝혀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번 확인한 자료인 <견첩록>과 <추담집>과 <문경부지>를 통해 견훤 탄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동안 우후죽순처럼 지역별로 회자하는 견훤 탄생설화와 유적에 대한 것은 대부분 구전 채록되어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에서는 원효대사가 지은 절에서 견훤 탄생 설화가 확인되고, 견훤이라 이름 지은 이유까지 확인할 수 있음은 매우 특별한 성과다.
2025년에 이미 고지도 3건에서 <추심사>의 표기와 <견훤궁기>라 표기한 지명을 찾아냈고, 이번에는 <추심사>가 큰절이며 절골에 있었는데 그 절 뒤뜰에서 견훤탄생 설화가 확인되어 견훤의 궁기 출생을 특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진(武珍)>이라는 지명이 광주가 아닌 <문경의 별칭>이었음이 밝혀져 무주 북촌은 <문경(절골)의 북쪽마을(고기, 상궁)>을 의미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또한 절골에는 <추심사>, 불당골에는 <의상암>이 존재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이제 견훤이 금하굴에서 태어났다거나 광주 북촌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불가능해진다.
이번 발굴된 새로운 자료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견훤 역사 복원에 정확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설화보다는 문헌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는 건 개인적인 호불호가 아니며, 한 걸음 나아가 이 자료를 두고 지명과 지리와 설화와 역사를 종합적으로 아우르게 된다면 그동안 논란이나 왜곡된 견해들을 바로잡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한 지역에서 한 인물을 두고 두 개의 설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그것도 하나는 영웅, 다른 하나는 미물로 나타나는 설화를 비교해 본다면 두 가지 다 평범한 인물이 아닌 가려진 역사 속에 묻힌 진실을 명징하게 잘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이리라.
이번 자료 발굴을 통해 복원해야할 견훤 유적은 견훤탄생 유적인 절골의 추심사이다. 그리고 심신의 수련과 무술을 연마했을 원효대와 의상대 복원이 필요하고, 의상폭포와 하강정도 햇갓골에서 갓바우재로 넘어가는 견훤의 역사 길임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이터골은 견훤 본궁이 있던 곳으로 <왕궁>이나 <생가> 복원이 필요하고, 상궁 불당골에는 멀리 견훤산성 등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암자인 <의상암>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견훤을 모시는 <골맥이>가 궁기골에만 5개소가 있는데 이 또한 손꼽지 않을 수 없으니 역사 복원이란 얼렁뚱땅 빠르게 시행하는 것보다 문헌 고증과 역사적 사실 등에 입각하여 가장 사실에 가까운 복원이 필요한 것이다.
끝으로 견훤은 9세기 멸망해 가는 시대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구국 영웅이자 반도의 통일을 통해 우리 역사의 중심이 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왕조가 너무 짧은 역사성으로 인해 그의 설화가 과장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미화하지 않은 진실한 역사의 기록으로 곳곳에 남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견훤은 잊혀진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신화의 강을 건너는 전설의 주인공으로 살아 조항산의 큰 바위 얼굴로, 궁기마을의 골맥이 수문장으로, 천마산의 성주로, 후백제의 건국왕으로, 후삼국의 통일 왕조로 다시 등극하여 이 땅의 백성을 요순시대로 살게하는 하늘이 내린 불멸의 군주로 남게 될 것이다.
첨부자료 : 추담집 (1710년)
【원문】
曾聞左右有遊華山之意今無難動之事否若於明早取路于楮谷抹馬于達川村越黃嶺三峴直入于聞慶內西里嚴孝信家問我行色則可以相會矣此則今日發向內西面下寒泉村明日優遊進士巷宮基推尋寺等處又明日直上華陰十餘里坐義相菴以待高筇到共觀眼底江山又明日往松面覽所占山數處因遊仙遊洞復下龍湫宿于雙龍菴又取路于多樂洞出于淸溪寺以爲分袂之地首尾可費七八日以此俶裝只佩錢而發則無驂亦輕便矣然此上義相菴未聞筇音則以未駕知之獨向松面然去年見華陽壁上一故畫則乃義相菴圖也默而識之似非偶然近又聞僧徒之言則義相勝於雙龍道藏今日吾輩一上遊目安知非奉承老先生之遺意耶翛然一出幸甚
【標點】
曾聞左右有遊華山之意。今無難動之事否。若於明早。取路于楮谷。抹馬于達川村。越黃嶺三峴。直入于聞慶內西里嚴孝信家。問我行色。則可以相會矣。此則今日發向內西面。下寒泉村。明日優遊進士巷宮基。推尋寺等處。又明日直上華陰十餘里。坐義相菴。以待高筇到。共觀眼底江山。又明日往松面。覽所占山數處。因遊仙遊洞。復下龍湫。宿于雙龍菴。又取路于多樂洞。出于淸溪寺。以爲分袂之地。首尾可費七八日。以此俶裝。只佩錢而發。則無驂亦輕便矣。然此上義相菴。未聞筇音。則以未駕知之。獨向松面。然去年見華陽壁上一故畫。則乃義相菴圖也。默而識之。似非偶然。近又聞僧徒之言。則義相勝於雙龍道藏。今日吾輩一上遊目。安知非奉承老先生之遺意耶。翛然一出。幸甚。
【飜譯】
■ 화산 유람 제안 및 일정 안내
좌우(친구 또는 동료)께서 화산을 유람할 뜻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었습니다. 지금 움직이기에 어려운 일은 없으신지요? 만약 내일 아침에 저곡(楮谷)으로 길을 잡아 달천촌(達川村)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황령(黃嶺)의 세 고개(三峴)를 넘어 문경(聞慶) 내서리(內西里) 엄효신(嚴孝信) 집으로 곧장 들어와 내 행색을 묻는다면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此)는 오늘 내서면(內西面)으로 출발하여 한천촌(寒)泉村에 내려가 자고, 내일은 진사항(進士巷)과 궁기(宮基), 추심사(推尋寺) 등지에서 여유롭게 노닐 것입니다. 그 다음 날에는 화음(華陰)으로 십여 리를 곧장 올라가 의상암(義相菴)에 앉아 귀하의 지팡이 소리(도착)를 기다렸다가, 눈앞의 강산을 함께 구경하고자 합니다.
그 다음 날에는 송면(松面)으로 가서 점찍어 둔 산 몇 곳을 관람하고, 이어서 선유동에서 유람한 뒤 다시 용추(龍湫)로 내려와 쌍룡암(雙龍菴)에서 숙박할 예정입니다. 또한 다락동(多樂洞)으로 길을 잡아 청계사(淸溪寺)로 나가는 것으로 이별의 장소를 삼으려 하니, 처음부터 끝까지 7~8일 정도 소요될 것입니다.
이 일정에 맞춰 행장을 꾸리시되(俶裝), 단지 돈만 차고 출발한다면 말이나 하인이 없어도 가볍고 편안할 것입니다. 다만 의상암(義相菴)에 올랐는데도 그대의 지팡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오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나 혼자 송면(松面)으로 향하겠습니다.
지난해 화양(華陽)동 벽 위에서 옛 그림 하나를 보았는데 바로 의상암도(義相菴圖)였습니다. 마음속으로 그것을 기억해 두었으니 이번 유람이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최근 승려들의 말을 들으니 의상암의 경치가 쌍룡(雙龍)이나 도장(道藏)산보다 낫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한번 올라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어찌 노선생님(先賢)의 남겨진 뜻을 받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나서보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