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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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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산(鳥項山)은 새의 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비상하는 <새목산>으로 부르고, 암봉이 갓을 쓴 것처럼 보여 소원 들어주는 <갓바우>라고 하며, 정상 암봉을 청화산 쪽에서 옆얼굴로 보면 위대한 영웅 탄생을 예언하는 <큰 바위 얼굴> 같다고도 한다. 조항산에서 대야산 사이의 고모령 우측 능선으로는 생명과 우주의 조화를 관통하는 창조주인 마고신(麻姑神)이 <마고할미 통시바우>와 <손녀마고 통시바우>의 모습으로 나란히 서 있다. 이렇게 웅혼하면서도 갖가지 모습으로 다가오는 조항산, 그 8부 능선 청화산 쪽 방향으로 문제의 원효대와 의상대라 부르는 곳이 있지만 과연 그곳에서 원효와 의상이 머물러 대(臺)를 쌓고 불도를 수행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이곳은 견훤의 왕궁이 있었다는 궁터와 접해 있고, 원효와 의상이 쌓았다는 원효대와 의상대, 그리고 백두대간으로 이어져 조항산과 청화산이 어깨를 겨누고 있다. 청화산 아래 명당 자리에는 수도 선원인 원적사가 있으며, 거기서 쌍용천을 건너면 도장산이 품은 심원사가 있음에 주시할 필요가 있다. 원적사 법당 뒤 큰 바위는 <학바위>라 부르기도 하고 <말바위>라고도 한다.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형국인 비학승천혈(飛鶴昇天穴)이기도 하고, 잘 달리는 말의 안장 올려진 바위 같아 예로부터 큰 꿈을 이루려는 사람들이나 관직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이 바위를 많이 찾는다. 원효와 의상의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져오고 지명 유래와 유적 유물도 있으므로 이를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원효와 의상은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같이 당나라로 길을 가던 도반이다. 의상대사(義湘, 625-702)는 화엄종을 최초로 일으킨 신라 고승으로 8세 위인 원효대사(元曉, 617~686)를 만나 친교를 맺고 그와 고구려 보덕 화상에게 〈열반경〉을 배우기도 했다. 661년 원효와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던 중 원효는 한 고분에서 깨우친 바가 있어 발길을 돌렸고, 의상은 화엄종 지엄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 귀국 후 부석사 등 사찰을 세우며 교화 활동을 폈다. 의상이 당시 유학 중 갑자기 귀국하게 된 것은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친다는 계획을 미리 알고 이를 왕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는 그 애국심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원효대사가 저술에 힘쓰고 개인적인 교화 활동을 펼치며 수많은 절을 창건(120여 곳)한 데 비해, 의상은 화엄종 교단의 조직에 의한 교화와 제자들의 교육(3천여 명)을 중시했다.
“원효대사가 도장암(道藏庵, 지금의 深源寺)을 창건 수행하고 있을 때, 의상대사와 윤필거사도 함께 수행 정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동자가 의상과 윤필을 찾아와 불법과 글 배우기를 청했다. 이에 몇 개월을 가르쳐 주니, 어느 날 동자가 자기는 청화산 기슭 용추(龍湫)의 용궁 속에 사는 용왕의 세자라 하였다. 용왕이 감사의 표시로 초청을 원한다고 동자가 전하자, 망설이던 세 분 중 윤필이 동자의 등에 업혀 용궁에 가서 극진히 대접받고 나오면서 용왕이 준 네 가지 선물인 병증(餠甑)·월겸(月鎌)·금부(金斧)·요령(堯鈴)을 받아 왔다. 그 후 병증(餠甑)은 용궁에서 필요한 것으로 여겨 돌려보냈고, 월겸(月鎌)은 없어진 내력조차 알 수 없으며, 금부(金斧)는 봉암사에서 보관하다가 1965년경 도난당했다고 한다. 요령(堯鈴)은 원효(元曉)가 원적사로 옮겨 보관해 오다가 지금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이다.”고 <한국사찰전서>와 <문경지>에서 전하고 있다.
역사 속 두 인물인 원효와 의상은 출가와 재가를 통해 우정이 돈독했고 두 날개를 가진 한 마리 새처럼 당나라 유학을 같이 시도하는 등 전국을 주유하고 다녔는데, 범어사에 가면 원효와 의상의 영정이 나란히 있고, 이 외에도 도장산 심원사와 삼성산 삼막사를 원효와 의상, 윤필거사 세 사람이 창건하기도 했다. 게다가 조항산 기슭에는 의상대와 원효대가 가까이 있으며, 원적사에는 <해동초조원효조사> 이름을 붙인 원효대사 진영(眞影,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이 전국에서 이곳에서만 소장하고 있음을 볼 때 원효가 머문 절이라는 점을 확언할 수 있다.
여기서 원적사와 심원사 창건은 660년이고, 견훤 탄생은 867년, 봉암사 창건이 879년인 것을 연대기 순으로 이어보면 원효와 의상이 청화산 아래 원적사와 심원사를 짓고, 청화산에서 5리 쯤 떨어진 조항산까지 오가며 원효대와 의상대를 쌓으며 수행과 정진을 계속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원효는 12살 때부터 화랑으로 활동을 하며 무예가 뛰어났고 특히 검술 실력이 빼어났으며 축지법까지 능했다고 전한다. 반면 의상은 하늘이 내려주는 음식인 천공(天貢)을 받아먹으며 놀면서 수도를 하는 것을 보고 원효가 이를 꾸짖었다는 기록을 보면, 원효는 자신의 이름대로 나라에 새벽을 깨우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의상은 의를 숭상하며 충효를 펼친 호국 스님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 뒤 2백여 년의 세월이 흘러 견훤은 농바우에서 태어나 말바우에서 명마를 얻었으며, 조항산 큰 바위 얼굴을 보며 꿈을 키우고 원효대와 의상대에서 무예를 닦으며 천하대장군으로서 호연지기를 길러 의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고모령에서 대간을 타고 조금 내려가면 희양산이 나오는데, 견훤이 13살 되던 해 지증대사가 봉암용곡에 큰 절을 지었으니 그 절이 봉암사다. 하여 영웅은 청화산과 조항산과 희양산 기운을 받았을 뿐 아니라 마고신의 천지인(天地人) 정신에 힘입어 새로운 역사 창조의 소명을 받았으리라.
어쨌건 농암에 발자취를 남긴 원효와 의상과 윤필거사의 역사, 그리고 궁터에 위치한 원효대와 의상대의 역사는 이렇게 정리가 되어진다. 하지만 그 뒤 시간이 흐르면서 의상대가 새로운 시비 거리를 남긴다. 그것은 조선 중기 선비인 김이원의 묘갈과 문경지, 청조향람 등에 기술된 의상대의 내용과 한자 표기가 서로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김이원의 묘갈>에서는 “김이원(金理元)은 소양서원에 배향된 김낙춘의 아들로 호는 의암(義岩)이다. 선조 때 도찰방을 지내고 효도와 학문에 힘썼으며, 만년에 의상대(義尙臺)를 쌓고 그 아래 하강정(下江亭)에서 소요하며 즐겼다. 문경현감 이경절(李景節)이 묘갈을 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상대를 의상대사가 쌓았는가? 아니면 김이원이 쌓았는가 하는 문제다. 김이원은 고향 농암을 찾아 효도와 학문에 힘쓰기 위해 의상대를 쌓고 그 아래 하강정을 지었다는 것을 당시 문경현감이었던 이경절이 썼으니 기록의 신빙성을 더 높여 준다.
<의상>이라는 지명은 현재 농암면 조항산 아래 의상대와 의상폭포, 조항산 너머 화북면 입석리의 의상동 마을, 그리고 청천면 삼송리 의상골과 의상저수지(송면저수지) 세 곳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곳들은 의상대사가 수도를 하던 곳이라는 지명유래를 갖고 있으나 한자 표기를 보면 서로 다름을 확인하게 된다. 청천면은 <의상(義湘)골>로 쓰고, 화북면은 입석리 <의상동(義尙洞)> 마을과 <의상대(義湘臺)>로 쓰고 있다. 하지만 농암면의 경우 <의상대(義尙臺)>로 다르게 쓰고 있는데, 차이는 강 이름과 당나라를 의미하는 <湘>자와 신라 숭상을 의미하는 <尙>의 차이점으로 보인다. 앞의 한자는 의상이 유학한 화엄종 중심지인 당나라 호남성(湘: 호남성의 옛이름)이 반영되었다면, 뒤의 한자는 충효를 숭상하는 상주목 가은현의 땅인 상주(尙州)가 반영된 것 같다.
여기서 원효 의상 윤필이 머물렀다는 기록을 인용해보면, 당시 의상대사가 대를 쌓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되자 이를 김이원이 새로 대를 쌓았고, 의상 폭포 옆에 하강정(下江亭 : 폭포가 보이는 정자)을 지어 효도와 학문에 힘썼다는 것으로 무리 없이 정리할 수 있다. 한자와 한글 표기가 조금 다르다고 하여 뜻이 다르다기보다는 역사는 하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한자가 바뀌고 발음이 달라진 것에 불과하다. 대를 보수하고 정자를 지어 학문을 수련하면서 김이원이 <공경할 상 : 尙>을 채택하고, 의상대를 <어상대>로 표기한 것은 지역민들이 <의>를 <어>로 발음하는 오류인 것이다.
의상대에서 충효를 가르치던 김이원의 호는 의암(義岩)으로, 의는 옳게 산다는 뜻을 담았고, 암은 조항산의 바위로 풀이된다. 그는 의인이 되고자 노력한 의상대사의 뜻을 새기며, 후학들에게 참된 의(義)를 가르치고자 노력했고, 그가 사랑한 건 조항산 큰 바위 얼굴(巖)이었으니 그가 이곳에 하강정을 지은 것은 궁터에서 성장 수련하여 건국 대왕이 된 견훤 정신을 가르치고자 함이 아니라 달리 무엇이겠는가.
순천 금전산, 봉화 청량산, 해남 두륜산에도 원효대와 의상대가 조항산처럼 나란히 존재한다. 하지만 조항산은 그들과는 달리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기록이 전하고 있고 단을 쌓았던 자리가 있을 뿐 아니라 견훤이 무예를 닦으며 궁을 지어 살던 궁터와 연계되는 새로운 역사유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견훤은 마고신의 힘을 입고 걸출하게 자라나 원효의 화랑정신과 무예를 이어받으며, 말바우에서 명마를 얻고 천마산에다 견훤산성을 쌓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세출의 장수가 되어 새로운 삼국의 역사를 써 내려 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효와 의상이 머물렀던 곳에는 원적사와 심원사가 있고, 쌍용계곡의 용궁에서 선물로 받은 요령이 직지사에 보관되고 있으며, 원적사에는 원효대사의 진영이 유적과 유물로 남아 있어 원효대와 의상대를 어찌 부정하겠는가. 후에 견훤이 농바우에서 태어나 궁터에 살면서 조항산 마고신이 새 기운을 불어 넣는 무한 축복을 받으며 원효대와 의상대에서 무예를 연마하며 성장기를 보낸 후, 원적사 뒤편 말바위의 말 안장에 오르는 꿈을 키워나가며 끝내 후백제 건국의 대망을 이룬 것이라 한다면 어떤 말로 이를 묵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견훤의 건국을 도운 김총의 후손인 김이원이 시조의 공훈을 재인식하고 후세들에게 견훤정신을 기리고자 의상대를 쌓고 하강정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친 역사는 우연의 일치를 넘어 엄연한 기록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위와 같은 기록으로 새롭게 정리하게 된 것은 <교남지 (嶠南誌)>와 <김이원의 묘갈>,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청조향람>, <문경문학과 8경9곡> 등의 참고문헌과 상주시, 괴산군, 문경시 홈페이지에 등재된 지명유래와 전설 등에 따른 것이다. 아직껏 잠들어 있는 견훤이 이제 궁터에서 원효대와 의상대를 오르내리고 청화산 너머 원적사 말바위의 기운을 받아 비학승천의 학의 기세로 명마를 타고 달리는 견훤을 만나게 되는 미명의 시간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가르며 후백제를 세워 통일을 이루려 했던 견훤대왕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는가.
참고자료
<교남지 嶠南誌> 문경군편 36권(1939년, 정원호(鄭源鎬)에는“하강정(下江亭)은 가 농암면 궁기리 갓바우재 암봉에 있다는 <의상대> 아래 있는 정자”라고 전해진다.
<김이원의 묘갈>에서는 “김이원(金理元)은 소양서원에 배향된 김낙춘의 아들로 호는 의암(義岩)이다. 선조 때 도찰방을 지내고 효도와 학문에 힘썼으며, 만년에 의상대(義尙臺)를 쌓고 그 아래 하강정(下江亭)에서 소요하며 즐겼다. 문경현감 이경절(李景節)이 묘갈을 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서도 “김이원(金理元, 1562~1632)의 자는 경초(景初)이고 호는 의암(義巖)으로 학행편 낙춘의 아들이다. 자여도(창원지방) 찰방(察訪)을 지냈고 효성과 우애가 있으며, 충성에 힘써 학문의 이치를 찾았다. 만년에 농암 궁기에 의상대(義尙臺)를 건립했고, 현감 이경절(李景節)이 묘갈을 지었다”
<청조향람> 지명유래에는 어상대(의상대)는 중궁 서남쪽 조항산 중턱에 있는 대로써 의상대사가 머물렀고, 상궁 남쪽에는 <원효대>가 있으며, 원효대사가 놀았다. 어상폭포(의상폭포) 는 어상대 밑에 있는 폭포로 높이는 4미터 정도. 전설에는 의상대가 청화산에 위치하며 산수가 아름다워 고승이 수도하기에 알맞아 신라의 명성인 의상대사가 일시 수도한 곳이라 한다. 원적사를 창건한 원효대사가 의상대에서 의상대사와 수시로 만나 불교 포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두분은 축지법을 잘했으며 의상은 하늘이 내려주는 음식을 받아 먹었는데, 원효는 의상에게 놀면서 천공을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고 나무랐다고 한다”
<상주시청> 지명유래에는 “화북면 입석리 의상동(義尙洞) 마을에 대해 옥양동 동쪽, 선돌배기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를 경계로 상주시 화북면 입석1리 의상동과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의상동으로 갈라져 있다. 청화산 북쪽 정상에 의상대사가 수도하였다는 의상대(義湘臺) 아랫마을로, 산기슭에 영덕암(永德菴)이란 암자가 있다. 충북 삼송리와의 경계에 큰 저수지가 있고, 그 아래에 소림사(少林寺)가 있다”
<괴산군청> 지명유래에는 “의상(義湘, 송상리)골에 대해 송상리(松上里)에 있는 마을로 옛날 신라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수도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적고 있다”
<문경문학과 8경9곡 - 문경문학사 시론을 겸하여, 신후식>라는 소논문에도 유행자(儒行者) 명단에 “고산(高山) 신언(申漹), 백석(白石) 강제(姜霽), 의암(義巖) 김이원(金理元), 강무선(姜茂先), 이장(李樟), 평거재(萍居齋) 신후석(申厚錫)....”이라고 기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