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송나라 강왕(康王)은 하나라의 걸왕(桀王)이나 은나라의 주왕(紂王)과 함께 역사상 지독한 폭군이었다. 그의 시종 한빙(韓憑)의 부인 하씨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었는데 그녀를 빼앗아 자기 첩으로 삼았다.
한빙이 왕을 원망하자 강왕은 억지로 죄를 씌워 성단형(城旦刑)을 가했다. 낮에는 변경 수비를 하고, 밤에는 병경 방비를 위한 장성을 쌓는 일을 하는 무거운 형벌이었다. 날마다 애를 태우던 하씨가 남편만이 알만한 표현으로 편지를 써서 남편에게 보냈다. "비가 그칠 줄 모르고 강은 크고 물은 깊으니 해가 나오면 마음이 닿겠네(其雨淫淫 河大水深 日出當心)."
그 편지가 어떻게 해서 강왕의 손에 들어가 측근에게 보였으나 아무도 해석을 하지 못했는데 소하라는 자가 나와 그 뜻을 풀어냈다. "비가 그칠 줄 모른다는 것은 당신을 잊을 수가 없어서 언제나 애태우고 있다는 뜻이고, 강은 크고 물은 깊다는 것은 당신 곁으로 갈 수 없다는 뜻이고, 해가 나와야 마음에 닿겠다는 것은 죽음을 태양에 맹세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한빙이 자살했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하씨 또한 뒤이어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그녀는 "임금님은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만 나는 죽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바라건데 시체와 뼈를 한빙과 합장해주십시오(王利其生 妾利其死 願以屍骨賜憑合葬)"라는 유서를 남겼다.
화가 난 강왕은 그 소원을 무시하고 일부러 한빙의 무덤과 마주 보이는 쪽에 매장하도록 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쪽 무덤 끝 쪽에 가래나무가 한 그루씩 생겨나더니 10일 남짓 되어서는 크게 자라나 서로 줄기가 휘어져 기대게 되고, 뿌리들이 뒤엉키고 가지들이 얽혀들었다. 게다가 암수 한 쌍의 원앙새가 그 나무에 둥지를 틀고서 밤낮없이 목을 교차해가며 아주 구슬프게 울어댔다.
그것을 본 송나라 사람들이 그 부부를 더욱 불쌍히 여기면서 그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고 불렀는데 상사병(相思病)의 어원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황하 남쪽 사람들은 원앙새를 한빙 부부의 환생이라고 믿고 있다고 하는데 오늘 날 의가 좋은 부부를 '원앙부부'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부부의 이상은 "살아서 같이 늙고 죽어선 함께 묻힌다"는 '해로동혈(偕老同穴)'이라고 하는데 이 꿈을 이루지 못한 한빙 부부의 원혼을 상사수의 가지와 뿌리가 서로 뒤엉키고 원앙새가 노래 불러 달래어주었던 것이다.
2006년 83세의 프랑스 정치철학자 앙드레 고르는 그의 아내 도린에게 긴 편지를 썼다. "우리는 서로에게 말했지요. 다음 생(生)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 하자고….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그는 아내가 20년 전 불치병으로 심한 고통을 겪자 모든 활동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 아내를 보살폈다. 그들 부부는 이듬해 함께 목숨을 끊어 58년 부부생활을 편지 글 그
대로 마감했다.
1912년 4월 14일 밤 불침을 장담하던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뉴욕 메이시백화점 주인의 아내인 이사토라 스트라우스 부인은 여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내준 구명정에 오르지 않았다. 남편 스트라우스가 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 부부는 40년을 오래 함께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서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남편이 가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든지 그를 따라가겠어요."
영국의 저명한 정치가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그가 수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부인의 내조 덕택이었다고 한다. 그가 국정단상에서 열변을 토할 때는 언제나 방청석에 부인이 앉아있었으며, 집에서 정책을 연구할 때는 부인이 항상 그를 격려하며 이것저것 도와주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디즈레일리에게 자작 작위를 수여하려고 했을 때 디즈레일리는 사양하며 말했다. "제가 오늘까지 국가를 위하여 다소라도 공훈이 있었다면 이것을 실로 제 아내의 공입니다. 제 아내에게 수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국사를 충실히 수행하다가 아내보다 늦게 사망했는데, 그의 공적을 높여 국장으로 하려 했으나 고인의 유언대로 아내의 곁에 묻혔다.
며칠 전에 미국 워싱턴공항공단 찰스넬링 회장이 6년 동안 치매를 앓아 온 아내의 손발이 되어 살다가 함께 죽었다.
그는 아내를 수발하는 것은 60년 동안 받은 뒷바라지의 빚을 갚는 일이라고 했다.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엔 "우리는 행복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뒤까지 살지는 않기로 했다"라고 했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남남이 만나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서로에게 스며들어 내 안에 너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는 삶. 지지고 볶아도 그것마저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 이기려 하지 말고 쉽게 포기 말고, 서로가 '도어 매트'(doormat; 문간에 깔아 놓는 신발 바닥닦개)가 되어 밖의 흙을 집안에 들여놓지 않게 하라. 부부란 한 쇠사슬에 발목 묶인 죄인, 그래서 발맞추어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살아서 같이 늙고 죽어선 함께 묻힌다면 이것이 행복이요, 그 이상의 인간 승리가 없다./배태영 경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