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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오피니언

쌍용에는 쌍용사가 있다

문경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4.09.27 18:49 수정 2024.09.27 06:49

글 - 김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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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청룡과 황룡이 산다는 쌍룡계곡, 그 계곡의 소(沼)에는 용이 산다는 <큰 용추>와 <작은 용추>가 있다. 큰 용추는 쌍용계곡에서 심원사 들어가는 다리 위쪽(쌍용터널 구간 계곡)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있고, 작은 용추는 사우정 정자 아래 위치하고 있다. 이 두 마리의 용을 쌍용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그 이름을 따서 지은 쌍용사는 어디 있을지 추측이 난무한다. 농암에서 쌍용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곳은 <쌍용용추>와 <쌍용계곡>이다. 거기서 화북 방향으로 약간 가면 <병천정(甁泉亭)>이 나오고, 정자 앞쪽 냇가에 펼쳐진 기묘한 바위들의 절경을 일컬어 용이 노니는 자리(龍游)라며 이 마을을 <용유동>이라 한다. 예서 북쪽 청화산 방향에 자리한 화산마을과 광정마을을 우리나라 십승지 중의 하나인 <우복동(牛腹洞)>으로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용이 살던 자리는 병천정 앞 용유동에서 시작해 쌍용계곡의 큰 용추와 작은 용추를 지나는 지역으로 보인다. 쌍용사가 이 지역에 존재했다고 주장해도 이를 쉽게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쌍용사는 용(龍)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고, 쌍용이 있는 이 구간을 벗어나면 용과의 인과관계를 논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 용추 부근은 예로부터 기우제를 지냈다는 <불일산(시루봉)의 기우단>이 있고, 용이 살법한 큰 소(沼)가 있어 물과 직접적인 연관성으로 인해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는 어려워진다. 과연 쌍용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예전 스님들은 터가 센 곳에 절을 지었고, 그곳에 좋지 않은 기운을 부처의 힘을 빌려 절이 누르게 하였다. 더구나 쌍용계곡은 <쌍용구곡>을 경영하게 되는 천혜의 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므로 그곳에다 절을 지어 수도 도량으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논리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그렇지만 도장산과 청화산 사이의 쌍용계곡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심원사(深源寺)쯤에서 발길이 멈추어진다. 왜냐하면 의상대사와 윤필거사가 이 절에서 용궁의 세자를 가르쳤고, 윤필거사는 용왕에게 초대되어 용궁에 갔다 오면서 극진한 대접과 월겸 월부 요령 등의 선물까지 받아왔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것은 청룡 황룡이 쌍용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용이 물에 살면 용궁이 있고, 용궁에는 용왕이 있으며, 용왕의 아들인 세자가 심원사로 공부하러 다녔다 함은 쌍용용추와 연관되니, 아무래도 그 용궁은 쌍용계곡에서 가장 깊은 큰 용추로 비정할 수 있겠다. 심원사는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년) 원효대사가 창건했고, 처음 지을 때 도장산의 이름을 딴 <도장암(道藏庵)>이었다. 그 뒤 진성여왕 4년(890년) 대운(大雲)조사가 심원사 북쪽에 <불일대(佛日臺)>를 새로 지은 후 조선 중기까지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여기서 나오는 불일대는 불일산(시루봉) 아래 <기우단>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그것은 불일대가 심원사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기록이 기우단과 정확히 일치하고, 그곳 기우단 역시 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설득력을 갖게 한다. 하지만 쌍용사라는 지명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현재 심원사가 위치하는 주변 풍수지리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장산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말한 우복동 길지를 빚어낸 명산이다. 그 산의 품 안에 안온하게 터를 잡은 심원사는 도장산에 깃든 수도 도량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복동천에 속하는 사람의 길지라 해도 부처의 설법을 베푸는 최고의 절터가 될 순 없다. 도장산(829m)에서 북으로는 떡시루를 닮은 시루봉(876m), 동북으로는 멀리 함박꽃을 닮은 작약산(774m)이 있고, 그 우측으로는 일곱 개의 봉우리를 가진 칠봉산(598m)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시루봉과 작약산이다. 시루봉은 떡을 쪄내야 하는 지형으로 시루 아래쪽인 쌍용계곡에서 불을 계속 지펴야 하고, 작약산(芍藥山)은 함박꽃이 붉은 꽃이자 화염의 형태를 띠고 있어 화기가 매우 강한 산으로 병풍처럼 서 있으니 이를 비보하지 않으면 도장암이 재앙을 입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풍수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 먼저 따질 필요는 없는 것이 풍수지리는 이미 우리 삶의 도처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풍수지리로 인한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니 도장암 스님들은 화산(火山)과 화염(火焰)에 대비해 절에다 물고기를 달고 연못을 팠으며, 그것도 모자라 도장암의 이름을 물을 다스리는 쌍용의 기운에 의지하고자 <쌍용사(雙龍寺)>로 이름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루봉 밑의 아궁이에 해당하는 곳은 부처의 힘을 빌리고자 불일대를 세우고, 그곳에 기우단까지 쌓는 방비를 하였으니 도장암 창건 후 긴 세월을 잘 견뎌 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뒤 선조 26년(1592년) 임진왜란 때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고, 곧 이를 중건하게 된다. 임진왜란시 선조를 호종하며 좌의정을 지낸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의 약포문집 4권 <쌍용사동유록기>에는 “내가 듣기에 문희의 가은에 기이하고 빼어난 곳이 있는데 용유동과 쌍용사라 하였다. 계묘년 가을(1605년)에 우연히 객을 데리고 가은의 용유동과 쌍용사에 들렀다가 다시 동쪽으로 20여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여 기이한 곳을 찾았는데 아포(阿浦)라는 곳이었다.”라 적고 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당시 쌍용사를 글의 제목으로 부칠 정도로 유명한 절이었다는 점과 쌍용계곡에서 아포(가은 갈전리)까지 거리가 20여리 쯤 된다는 언급이 실측과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쌍용사는 쌍용계곡에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혹자는 농암면 율수리 현재의 쌍용사를 언급하기도 하나 그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임진왜란 뒤 이 절의 연일(然一)이 유정(惟政)을 도와 일본에 가서 포로들을 데려오는 등의 공훈을 세움에 따라 1605년(선조 38년) 나라로부터 부근 10리의 땅을 하사받는다. 그러면서 영조 5년(1729년) 낙빈(樂貧)이 옛 절터에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현재의 심원사로 고쳤는데, 그것은 쌍용사라는 이름만으로는 화산의 비보가 되지 않아 더 깊고 근원이 되는 물로 잘 다스려야 한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심원사(深源寺)>로 고쳤을 법하다. 1775년에는 남악(南嶽)이 중건했으며, 1922년 주지 해응(海應)이 산신각을 새로 지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름 있는 절로 다시 명맥을 유지했으나 1958년 다시 건물이 모두 또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만다. 이후 고을의 문사인 김상건의 <백치자연보>에는 “1963년 심원사 중건에 2천원의 의연금을 최법사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화재로 절을 소실한 이후 지역민들의 많은 모금을 통해 중건이 원만하게 추진된 것이 확인된다. 먹고사는 문제가 팍팍했던 1964년 법당과 요사채를 세워 다시 절을 일으킨 것은 심원사에 대한 농암 사람들의 사랑이 각별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예전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고 초라하게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했던 역사가 자취 없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용은 날개가 없어도 승천한다. 결국 고승인 윤필거사와 의상대사가 지극한 불도의 수행으로 열반하여 두 마리의 용이 되어 승천했으니 고승에게 수도한 쌍용의 지킴이는 용소에 살고 있으나 도장암을 창건한 두 용이 없기에 불이 자주 난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탁대감은 남달리 천문에 능하였으니 임진왜란 때 쌍용사에 불이 나자 화기를 잘 비보해야 한다는 말을 당부하였으리라. 오늘도 용추에는 청룡 황룡의 쌍용이 머물러 이곳 수호신으로 심원사를 변함없이 지켜주고 있으니 쌍용사 절은 이제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게 아니라 농암면 내서리 쌍용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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