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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오피니언

고릉(古陵)에서 가야를 찾다

문경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4.03.13 14:01 수정 2024.03.13 02:01

선사시대의 역사 고증은 대부분 기록이 아닌 유적이나 유물에 의존한다

ⓒ 문경시민신문
선사시대의 역사 고증은 대부분 기록이 아닌 유적이나 유물에 의존한다. 그것은 당시 문자로 전하는 기록물이 없기 때문이며, 있다 하더라도 전문가의 견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우리 역사는 문자 기록이 유지되던 고려시대로 넘어와서야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산해경>, <동국통감>, <고려사>등에 의해 근거하여 재정리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왜곡되지 않아야 하며 잘못이 밝혀지면 수정함이 당연지사인 것이다. 근자에 고령군 지산동고분군 등 우리나라 남부 7개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운데, 성주 성산가야와 상주∙문경의 고령가야는 여기서 빠지고 말았다. 남부 가야 각국과의 문화적 연계성이나 공통점이 부족하므로 가야 문명으로 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고분군 형식이나 출토되는 유물들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되는데, 고령가야국이 있던 함창을 중심으로 최근 이를 거증할만한 고분들이 연이어 드러나고 있음에도 사학계에서는 종전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고령가야라는 지역이 원래 신라의 영역이고, 진한의 사벌국지역에 속했으며, 신라말기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이 지역 호족들이 가야를 참칭하여 그것이 가야국 중 하나인양 와전되었다는 눌변을 펼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야조에 엄연히 고령가야국이 기록되어 있고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 등이 확인되고 있음에도 종래의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기득권을 가진 사학자들의 극단적 이기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첫째, 고령가야국이 신라영역이고 사벌국에 속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사벌국은 신라 첨해왕에게 복속되었다가 신라를 배신하고 백제에 귀속하자 석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토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반해 “고령가야국 3대 이현왕은 첨해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오자 다른 가야국들과 연합 대치하다가 힘에 부쳐 금관가야(김해)로 도읍지를 옮겼다.”고 적고 있다. 이를 연대기 순으로 보면 양국이 별개로 존재했으며, 첨해왕이 먼저 사벌국을 복속시키고 후에 고령가야국을 다시 침공한 것이다. 그것은 고령가야국이 사벌국과 접경하고 있지만 사벌국보다 훨씬 강성하여 신라가 섣불리 사벌국 복속시 곧바로 침공하지 못하고 서라벌에서 먼 길을 재 출병하여 전략적으로 침공하는 어려움을 감수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므로 고령가야국은 신라의 한 영역이 아니며, 사벌국과는 달리 신라에게 패한 후 금관가야로 망명했다는 기록을 보면 가야연맹의 강소국 중 하나였음이 더 분명해진다. 둘째, 고령가야국은 <공검지>를 중심으로 농경문화를 꽃피운 강소국이다. 삼국시대 초기는 농경사회이므로 <공검지>는 당시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와 함께 최고의 권력자들이 소국을 이루고 살 수 있는 천혜의 곡창지대이다. 그러므로 농경문화가 일찍 발달한 곳은 다른 지역보다 먼저 계급사회가 생길 수밖에 없다. 공갈못 전설에서 <인신희생제>가 등장하여 못에 사람을 바치는 희생제의는 곧 지배자가 주관화되어 물 사용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었고, 또 이 지역이 뽕나무가 많아 누에고치를 생산한다는 것도 고령가야국이 힘없는 소국이 아니라 오히려 사벌국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백제가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으며, 3국이 중요한 요충지임을 알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결국 신라가 점령하게 된 것이다. 셋째, 고령가야는 지명을 통해 낙동강 수계로 이어지는 가야국임이 확인된다. 가야국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상류에는 <함녕(咸寧)>이 위치하고 최하류에는 <함안(咸安)>이 위치한다. 여기서 함안과 함녕의 “(咸)은 다, 모두, 같다, 널리 미치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 가야국이 낙동강을 두고 시작과 끝점으로 맺어진 하나의 연맹이며, 알파와 오메가라는 자연적인 사슬로 연결된 일족이라는 점이 입증된다. 넷째, 한때 강성했던 고령가야국을 마치 신라 후기 호족들이 고령가야로 참칭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첨해왕이 고령가야를 복속(서기 249년)시킨 뒤 위상을 격하시키고자 아예 <사벌주>로 포함시켰는데, 이는 말썽소지가 있는 가야의 근간을 없애기 위한 신라의 정지작업일 것이다. 이때 첨해왕은 고령가야를 <고동람군(古冬攬郡), 고릉(古陵)>이라 했다는 기록을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고동람>이라는 지명을 보면 옛고(古: 오래된 나라) + 겨울동(冬: 잠든무덤) + 주관할람(攬: 왕)의 뜻은 “고령가야의 왕이 잠든 무덤”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읽혀지고, <고릉(古陵)>은 “오래된 능이나 큰 무덤”이라는 뜻으로 고동람보다 더 명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첨해왕의 복속보다 이미 오래전 고령가야국(서기 46년 건국)과 왕릉이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757년 신라 경덕왕이나 고려 태조 23년 5가야의 명칭을 변경하면서 <고령가야(古寧伽倻)>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는 말은 한참 뒤의 일인 것이다. 적어도 첨해왕 때 고동람이나 고릉이 이미 존재했고, 후에 고령으로 지명이 변했다는 게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 다섯째, 가야국과 왕으로 연관되는 지명이 다수가 있다는 점이다. 낙동의 가야성, 중동의 봉황성, 함창의 대가산(大駕山), 상감지, 국사봉(國祠峯), 용궁면 가야리 등 다수가 있어 단순히 사학자들의 주관에만 의존하지 말고 주변 지명을 통한 역사의 고증을 시도해 보는 노력도 필요하리라 믿는다. 요즘은 불변이라 하던 진리마저도 바뀐다는 세상이다. 옛날에는 경주와 상주가 신라의 중심이었는데, 상주로 대변되는 고령가야국을 왜 초라한 호족집단으로 매도할까? 역사의 오류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할 이 시대의 숙업이 아니겠는가. 수천년 전의 역사를 쓰면서 편하게 임나일본설을 끌어오거나 터무니없는 억설로 역사를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충분한 근거와 확신이 있다면 받아들이겠지만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고 무조건 배척하거나 아니면 더 명확한 공적 자료를 내라는 식의 고압적 횡포를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령 이전 명칭이었던 <고릉>에서 그동안 묻혀있던 고령가야국의 역사를 새롭게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고릉이 고령가야국의 왕릉이 아니라면 무엇인지 누가 시비라도 걸어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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